먼저 그림의 왼쪽 끝에 있는 요한을 살펴보자. 요한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을 잡으려는 듯 자신의 팔로 허공을 휘저으며 예수에게 ‘등을 돌려’ 황급히 도망치고 있다. 그림 밖으로 일부가 나가버린 왼쪽 팔처럼 그의 몸뚱이 또한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튀어 나가 버릴 것만 같다.
스승의 체포를 외면한 채 자신만 살겠다고 달아나는 그의 등 뒤에서 펄럭이고 있는 짙은 붉은색의 겉옷(망토) 자락 끝이 경비병에게 잡혀 뒤쪽으로 돌아가 있다. 요한의 오른쪽에 있는 예수 또한 붉은색의 옷을 입고 있지만 예수가 입고 있는 붉은색은 요한이 입고 있는 것보다 좀 더 밝은 붉은색이다.
붉은색은 사랑을 상징한다. 펄럭이고 있는 유다의 짙은 붉은 겉옷 자락이 예수와 유다의 얼굴을 더욱 부각하고 있다. 허공에 손을 저으며 혼비백산 도망치고 있는 유다의 얼굴에서는 당황과 두려움이 부각되고 있고, 제자들의 배신과 자신의 체포를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얼굴에서는 스승으로서의 사랑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부각되고 있다.
무장한 경비병들을 데리고 온 유다는 그림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온 경비병들의 검은 갑옷과 투구가 검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또 다른 작품인 <의심하는 도마>에서의 도마처럼,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유다’가 이 그림의 주인공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예수의 오른쪽 옆에서는 그의 제자 유다가 누가 예수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예수의 볼에 입을 맞추려 몸을 기울여 있다. 이 행위가 유다와 경비병들 사이에 맺어진 ‘누가 예수인지를 가리키는’ 비밀스러운 신호이다. 스승을 배신하는 유다가 스승의 볼에 입을 맞추려 하다니, 유다의 배신은 여기에서 정점에 이른다.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입맞춤은 사랑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배신과 시기가 들끓는 곳이기에 모든 입맞춤이, 그것이 아무리 달콤한 유혹이라 해도, 사랑의 행위만은 아닌 것이다.
유다의 표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마에 새겨진 깊은 주름만큼이나 그의 표정이 불편해 보인다. 근심으로 가득 차있고 검은빛이 감돌고 있는 눈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하다.
유다는 지금 인류의 구세주이자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배신하고 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나 행위를 떠나, 결코 씻을 수 없는 ‘영원한 죄’를 짓고 있는 그의 마음 또한 편치 않을 수밖에 없다. 유다의 표정에서 유다가 후회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간이란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시킬 수 없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결국 유다는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죄의 대가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이미 저지른 실수는 되돌릴 수 없고, 때가 늦어서야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닫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림은 얘기하고 있다.
“배신은 죄이고 그 죄의 대가는 사망이다.”
The Picture Gallery in the park of Sanssouci Palace, Potsdam, Germany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도의 체포>에서 예수를 배신하는 인물인 유다는 카라바조의 다른 작품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1602, Sanssouci, Potsdam, Germany)>의 인물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작품들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들에서처럼 ‘읽을거리’와 ‘상상거리’를 제공하는 정교한 장치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비밀스러운 상징과 코드가 그림 안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아 작품 앞을 서성이게 한다는 점은 카라바조와 레오나르도의 공통점이다.
카라바조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요구되는 부분이 있다. 카라바조의 내면세계와 삶에 대해, 레오나르도보다 조금 더 아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카라바조는 1602년 같은 시기에 <의심하는 도마>와 <그리스도의 체포>를 그렸다. 그때의 카라바조는, 그가 저지르고 있던 각종 범죄행위는 별도로 생각했을 때, 예술적으로나 신앙적으로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카라바조는 유다의 배신과 도마의 의심을 씻을 수 없는 동일한 죄로 여긴 것으로 볼 수 있다.
하긴 도마의 의심이 속인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의심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리스도를 의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불신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이므로, 의심을 배신과 동일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유다와 함께 예수를 잡으러 온 경비병들 중에 한 명의 억센 팔이 그림의 중앙을 가로질러 예수의 멱살을 잡고 있다. 멱살이 잡혀 움직이질 못하는 예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지만 결코 당황하지 않고 있다.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을 굳이 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저버리고 달아나기에 바쁜 요한의 배신과 경비병들에게 자신을 넘기고 있는 유다의 배신이 너무나도 슬펐을 것이지만, 체포당해 끌려가야만 하는 현실이 싫었을 것이지만, 양손을 깍지 낀 채로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거부나 저항 없이 그 모든 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의 복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가 입고 있는 옷의 붉은색은 ‘예수의 제자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팔에 걸치고 있는 겉옷의 파란색은 ‘인간 세상으로 예수를 내려 보낸 하느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와 하느님의 사랑이 겁 많고 어리석은 제자와 인간을, 배신이라는 큰 죄악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그림이 주고 있는 메시지는 제자들의 배반과 인간으로서 예수의 고뇌와 사랑, 심판이다.
이 작품에서 카라바조의 역할은 사건의 현장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는 기록자이자 목격자이고 직접적인 참여자이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자의식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그림의 오른쪽 끝에서 오른손에 등불을 치켜들고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바로 당시 서른한 살이었던 카라바조 자신이다.
그는 지금 등을 돌린 채로 황급하게 도망치고 있는 제자 요한과 불온한 의도로 예수의 볼에 입을 맞추려는 또 다른 한 명의 제자 유다와, 제자들의 배신과 경비병들의 거친 손짓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카라바조의 등 뒤는 어둡다. 카라바조가 등불을 들고 이 배반의 현장을 밝히고 있는 것은, 예수의 체포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다. 카라바조는 지금 사건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엉켜있으니 분명 사건의 목격자이자 참여자이긴 하지만 ‘예수를 배반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참여자는 아닌 것이다.
이 작품에서 검게 칠해진 배경은 폭력과 죄악에 물든 세상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카라바조가 손에 부여잡고 있는 작은 등불조차 없다면, 자신들의 세상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은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음을 이 배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로마의 뒷골목 술집과 사창가를 기웃거리면서 폭력과 배신을 일삼았던 카라바조는 이 작품 안에서 세상과 그리스도를 밝히면서 스스로의 죄를 조금이나마 속죄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또는 기록자로서 이 사건을 더욱 잘 관찰하기 위해,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이 중요한 사건을 좀 더 부각해 보이게 하기 위해, 그의 오른손으로 등불을 높이 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의 왼쪽 끝에 그려져 있는 요한은, 반대편인 오른쪽 끝에 그려져 있는 카라바조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제자 요한은 겁에 질려 세상의 구세주이자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버리고 달아나고 있고, 카라바조는 등불을 들고 예수에게로 다가가고 있다. 카라바조는 생각한 것 같다. 자신이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 1600여 년이란 시간이 지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한낱 죄 많은 인간에 불과할지라고 해도,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신의 작품 안에 자신을 그려 넣는 것은 카라바조 이전에도 있어왔던 일이며 일종의 ‘화가의 서명’이라 할 수 있다. 카라바조가 이 작품에 자신을 그려 넣은 것 또한 그가 활동하던 17세기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관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이 사실적인 작품을 통해 그림을 감상할 사람들에게 강한 암시와 함께 주문을 하고 있다.
“예수가 체포당하던 그때 그곳을 끝까지 지켰던 나처럼, 그림을 보는 사람들 또한 굳건한 믿음으로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를 배신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적 측면을 배제하고 해석하게 된다면 그림에서 카라바조의 존재와 그가 들고 있는 등불은 후일 카라바조의 발자취를 따를 예술가들을 현실적이면서 사실적이고, 인간적이면서도 자연주의적인 그의 예술 양식으로 초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른쪽의 이 ‘등불을 든 남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다. 그는 예수의 첫 번째 제자이고, 자신의 스승이자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를 첫 번째로 부정한 배신자이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의 빛을 세상에 가져다준 첫 번째 교황인 성 베드로(St. Peter)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 등불을 든 남자가 성 베드로를 그린 것이라면, 그림 속의 그가 손에 잡고 있는 등불은 단순한 조명으로서의 장치가 아니라 세상을 밝힐 그리스도의 빛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그가 그리스도의 빛으로 세상을 밝힐 첫 번째 제자였기에, 교회의 초대 교황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등불을 든 남자를 카라바조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보려는 것이 먼저 보이고 들으려는 것이 먼저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카라바조의 드라마틱한 삶을 이 등불을 든 남자에게 이입하면, 좀 더 극적인, 그래서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달려 나올 것 같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