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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적 관점과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인간의 언어

창조론적 관점과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인간의 언어                        

상상 속에서 헤아려 보는 것조차 막막하기만 한 멀고 먼 아주 오래 전에 이 땅에는, 후일에 가서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라 불리게 된 일단의 무리가 여기저기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살기 시작했던 '오래 전'이란 것은 시간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어느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숫자의 절대적인 값으로 담아내기에는 곤란할 수도 있는, 구간의 범위 또는 개략적인 기간을 말하는 ‘때’인 것이다.


그 오래전에도 시간이란 개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이 그때도 시간은 흘렀다. 

그때의 어느 곳인가는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자기가 있었음에 대한 흔적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어쩌면 존재한다는 것이 서쪽에서 불어오는 미풍 한줄기와도 같이 미약하기만 했던 그들 인간은, 어떤 주어진 계기나 자의적 노력을 통해 결국에는 스스로를 세상의 한가운데에 위치시키게 되었다.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그들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겠지, 간혹은 궁금해진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오래 전의 그즈음을 ‘세상의 태초’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대략' 또는 '그즈음'과 같은 문자적 표현의 유용성은 이렇게 설명하기에 곤란한 그 무엇조차도, 잘 닦인 은쟁반에 담아낸 맑은 날의 애프터 눈 티세트처럼, 그럴싸하고 보기 좋게 챙겨낼 수 있는 반짝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인간이 있었기에 세상의 태초가 있게 되었다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 속에서 세상과 인간은 지금껏 그럭저럭 타협을 이루어내며 잘 지내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인간이 세운 이 인간 중심의 '태초'라는 개념에 대해, 비록 그것이 신의 권능에 도전하려고 사상적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신성적 범법행위로 비춰질 수 있을지라 해도,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가며 오류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내거나 애써 트집을 잡으려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래봐야 결국에는 알량한 지식의 바닥만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살아보면 언젠가는 알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절대적이고 고정된 사고 속에서는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것들이 사방에 무수히 늘려있음을 알게 된다. 

세상과 인간의 관계란 것이, 세상이 있었기에 인간이 있게 된 것이든, 인간이 있었기에 세상이 있게 된 것이든 간에, 지금이라는 ‘한 때’를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의 세상살이에 뭔가 특별한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이니, 적당한 타협과 수긍이 주는 위로와 안위는 사고적인 비약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즉 ‘인간 언어’에 관한 것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 언어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이 이야기의 첫걸음은 “태초부터 인간에겐, 그것이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건 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건 간에, 사용이 허락된 또는 인간에 의해 사용이 가능한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분명히 그러한 것이다.”라는 논리적으로 ‘참’인 명제로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원래 무언가를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과 관련된 핵심적인 몇 가지 것들을 전제(前提, premise)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혹시라도 논리적인 부족함을 발견한다면, 그런 높은 지적 수준을 지닌 독자라면, 화자가 가진 지적 수준으로 인식의 문턱을 충분히 낮추는 것이 좋다. 

지식이란 것은 언제나 사회적 이성에 스스로를 묶어 버리기 마련이라 낮추어진 인식의 임계치는 이성적 추론에 대한 감성적 추측에 커다란 자유를 줄 수 있다.     


인간언어: 창조론적 관점과 진화론적 관점

태초에 인간이 사용했던 언어가 어떤 형태였고 어떤 표현 방식을 사용하였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 언어를 '태고 언어' 또는 '씨앗 언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인간 언어의 모태가 된 이 언어는 감성적 추측과 이성적 추론이라는 인간 사고의 합리적 활동을 통해서 그 원형에 대한 몇 가지의 실마리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의 탄생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그 시작을 창조론적인 관점이나 진화론적(자연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어려워 보일 수는 있지만 사실 이 두 가지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 언어의 복잡성에 비한다면 비교적 간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의 인간 언어

“태초 인간을 창조하신 신께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어여삐 여기사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하사하셨다.”가 창조론적인 관점일 것이다. 

언어가 없는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이 말은 “인간은 타인과 교류하며 살아가는 동물이다.”라고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 

타인과의 교류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며 이 본능은 태초부터 인간에게 내재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고립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고립은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고 인간성을 잃게 만드는 악마적 주술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들뢰즈 식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교류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영토화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교류가 일어나는 곳에서 인산은 자기 자신을 재영토화하게 된는 것이다. 

이러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영토화의 수단이 바로 언어이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언어를 보면 태초에 신이 인간에게 하사하신 언어는 ‘신이 사용하고 있던 신의 언어’이거나 ‘그분의 작품인 인간을 위해 그분이 손수 만드신 새로운 언어’, 또는 ‘기존에 그분이 사용하시는 언어를 인간을 위해 적당히 변경시켜 만든 언어’일 것이다. 

따라서 창조론적 관점에서 언어의 소통이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만이 아니라 인간과 신 사이의 소통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인간 언어

하지만 진화론적인 관점에서의 인간 언어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만 한다. 

진화를 통해 자연 발생한 인간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손짓 발짓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역사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차츰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어갔다.”는 영겁과도 같은 길고 긴 여정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 진화론적인 관점에서의 인간 언어라 할 수 있다. 


즉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인간 언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인간 언어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인간 언어 또한 진화를 통해 형성되고 성장한 것이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었다. 인간 언어는 그 탄생으로부터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언어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 언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위한 언어이기에 신과의 소통에서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보적 창조론에서의 인간언어

창조와 진화(또는 자연발생),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접근법을 선택하든 간에 인간의 언어는 이후, 진화라는 지루하고도 기나긴 과정을 거치어 왔고, 또한 지금에 와서도 그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어쩌면 진화는 어떤 외적인 요인의 작용에 의해 ‘되는 것’ 또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하는 것’ 또는 ‘이루는 것’일 수 있다. 


진화는 아주 더딘 행위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더디기만 해서 마치 멈추어 선 것과 같이 느껴지는 것이 진화이다. 

너무 오랜 기간에 걸친 진화는 다양한 변이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변이는 어떤 것들의 ‘끼어들기’가 발현시키는 것이어서 더딘 것에게는 늘 변이가 따라 붙기 마련이다. 

따라서 현재의 인간 언어에서 태고 적의 흔적을 찾으려는 것은, 가없이 너른 바닷가 모래사장에 떨어뜨린 바늘 하나를 찾으려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어쨌든, 인간의 언어에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과 '진화'라는 관점을 더해 본다면 언어는 ‘창조 후 진화’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과 정신을 평화롭게 만드는 현명한 진보적 창조론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발생을 이러한 ‘진보적 창조론’에 무게를 두는 것은 비단 종교적 취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가진 무한한 능력에 대한 경외심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다. 


만약 종교적으로 접근한다면 믿음이라는 완고한 절대성이 거부감이란 자기 방어적인 기재를 강력하게 발동시키게 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논리적 영역에서는 그것을 단지 참인 명제로만 받아들이면 다음 단계를 향해 걸음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임계치를 낮춘 논리적 해석이 고귀하기만 한 종교적 접근보다 인간에게 더 친숙한 것일 수 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려 할 때, 종교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인간은 늘 먼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있다.

믿음에 있어서는 “신이 있다.”라든가, “그것은 그러한 것이다.”라는 명제나 공리와 같은 전제가 그것이다. 

그런 전제들은 개인이 가진 지식의 크기와 깊이에 비례한다. 

따라서 ‘익힘’과 ‘추론’에 강한 인간은 충분한 전제를 둘 수 있는 사람이고, 전제가 충분하다는 것은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깊고 큰 전제를 자신의 책상 위에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게 전제가 작고 깊이가 얇은 인간은 작은 것에서도 고집을 피우고 자신의 주관적인 당위성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만이 옳고 타인의 주장은 모두 틀렸으며,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읍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진실로 진보적인 이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보적 창조론’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서 ‘논리적이고 종교적인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어딘가에 남아 있을 인간 언어의 씨앗 또는 뿌리 찾기는 인간적인 탐구의 오래된 주제이다. 

그 탐구를 통해서만 인간 언어는 더욱 자유로워지고, 인간은 신성 또는 자연성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탐구를 사색이라고 할 수 있겠고 문학과 철학은 그 탐구 괴정에서 발생하는 지식의 유희를 인간 언어로 새겨 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에서, by Dr. Franz Ko(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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