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인연과 존재 그리고 인드라망, 수미산을 내려가며

수미산을 내려가며

유리창에 맺혔던 빗물 방울이 쭈르륵 흘러내린다. 

제 때를 찾아내려서는 것이 세상의 순리를 따르는 일이다. 

더 늦어지면 버틸 만큼 버텼다, 견딜 만큼 견뎠다는 눈총을 받게 되기 십상이다.


이제 산을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내려두었던 아침 차의 향기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한다. 

살짝 갈변되어 가는 차색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한다. 

시간이 꽤 흘렀나 보다. 

수미산에서의 찰나는 억겹과도 같은 생각에 빠지게 한다.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은 그것을 가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아침 차의 남아 있는 온기에 존재의 욕심은 번민의 찌꺼기가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어차피 올라올 때 빈손이었으니 내려갈 때도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 색즉시공(色卽是空): 현실 세계를 차지하고 있는 물질적 존재는 모두 인연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색즉시공이란 ‘물질적인 것에는 불변하는 고유의 존재성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 공즉시색(空卽是色): 본성인 공(空)이 바로 색(色)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색이란 만물(萬物)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의 본성인 공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하여 임시로 다양한 만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색이란 공이 만들어낸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기에 세상의 만물은, 비록 물질적인 현상을 가진다고 해도 결국 그 어떤 것도 고유한 존재성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색은 실체하지 않는 임시적인 현상인 것이다.


• 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적인 색(色)의 세계와 평등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불교 범어(梵語)의 원문에서는 “이 세상에서 있는 모든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는 더 이상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표의 문자(表意文字)인 한자(漢字)로 한역(漢譯)한 것이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 열 여섯 글자 중에서 여덟 글자로 줄인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그 뜻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문장을 살펴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색(色)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空)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를 때 그랬던 것처럼 내려설 때도 발 앞만을 보게 만드는 것이 산이다. 

올라서는 것과 내려 서는 것이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인 것처럼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다.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하긴 그 깨달음조차 이내 변색되고야마는 것이 세상사이다.  


이제 수미산을 거의 다 내려왔나 보다. 

시간은 기어이 흐르고 만다. 

어느새 머리카락에는 허연 서리 같은 세월이 잔뜩 내려앉았다. 

인간 세상의 초입에 있는 자그마한 오두막집의 뒤뜰 굴뚝에서 아침밥 짓는 연기가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 기어오르고 있다. 

그 앞을 지나다가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걸음을 멈추어 선다. 


붉고 초록의 둥근 방울들이 가느다란 가지마다 뒤엉켜 매달려 있다. 

내가 사는 이곳이 둥글고 작은 하나의 세계이듯 방울토마토가 달려있는 저곳 또한 또 다른 인드라의 그물인가 보다.     


방울토마토, 인드라망의 세계     

새벽의 호흡이 한 가득 내려앉은

뒷마당 작은 텃밭에 

기억의 향기를 잔뜩 가둔 

방울토마도의 둥근 포말이

선잠 갓 깨어난 무거운 바람을 맞으며 

얼기설기 맺혀있다   

  

부르르 몸을 떨며 털어낸

간밤의 농익은 내음이

천지간을 하나로 잇는다    

 

굵게 박힌 뿌리에서 

땅을 뚫고 하나로 자라나서

줄기를 타고 구불구불 오르다가 

하늘을 향해 제 각각 갈라져 

가지마다 이슬처럼 자라나니,

둥그런 모양은 닮았지만 

붉거나 파란 표피의 미소조차

어느 것 하나 구분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향기를 일일이 헤아려 맡기에는

미세하지 못한 코의 기능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눈을 열어 보고 손끝으로 만지는 것이 

코의 허술한 신경보단 앞서기에

떨리는 손끝으로나마 가볍게 쓱쓱 비비니

새벽안개의 진청색 그늘에서 

무수한 둥근 방울이 얼굴을 반짝인다   

  

하나마다가 다른 세계이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니

저 작은 텃밭에서 나고 자라난

방울토마토의 삶에도

인드라의 그물이 한없이 펼쳐져 있나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