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인드라망과 인간의 존재

인드라망과 인간의 존재


세상의 모든 개체는 인드라의 그물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도록 연결됨으로써 ‘자신을 위한 존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연이라는 것 또한 인드라의 그물을 구성하고 있는 개체로써 그물을 벗어나지 않을 때 비로써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드라의 그물에서 ‘인연’이라는 ‘실체 하지 않는 관념적 현상’은 이제 ‘비추상적인 개체’가 되어 하나의 ‘실재하는 관념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태초부터 오만함을 내재한 채 탄생한 우리라는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재적 가치를 부여받은 것’이라고, 그래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스스로가 “존재한다.”하고 여기면서도 때때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 우리라는 인간이 가진 아이러니한 점이다. 

그래서 인간은 실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이중적인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에 대한 물음을 혼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만물이 그러하듯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은 존재의 자치를 지녔다는 의미이기에 존재의 가치에 대한 물음은 곧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시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만도 않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은 분명 그러한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인드라의 그물에서 나는 그물의 한 부분이고 나의 구슬은 누군가 또는 어떤 개체를 비춤으로써 그곳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가치를 갖게 된다. 또한 무수한 인연의 고리 속에서 그들 또는 그녀들, 또는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무수한 개체들이 나를 비추고 있기에 나는 비로써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욕계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관점만을 부각시킨다면 인연은 개체와 개체를 연결시켜주고 있는 핵심적인 속성이다. 

그렇다면 가까이에서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때로는 나의 내면까지 훤하게 비추어 주었던 인연이, 지나온 어느 날인가의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분명 나의 구슬 또한 어떠한 형태로든 인드라망의 그물코에 매달려 있을 텐데 나라는 구슬은 어디쯤에 자리를 잡고 있을까. 


나라는 구슬은 절대적인 것일까, 상대적인 것일까. 영원히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일까, 상황에 따라서는 이동이 가능한 것일까. 

그 크기는 어떠할까. 

다른 구슬과 같은 크기일까 혹시 더 작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 

반짝이고 있을까 아니면 빛을 잃어가고 있을까. 


생각이 생각에 무수히 엉켜 방향 없이 번져 나간다.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그곳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속한다는 것을 포함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물에 걸려 있는 개체들은 나와 나의 주변에 언젠가 존재했었고 또한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내가 인지했었고 인지하고 있는 그 무엇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있다는 것’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는 또 다른 질문의 초입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빛이 흐려진 나의 구슬을 어떻게 닦을 수 있을까. 

닦지 못한다면 다른 구슬로 교체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언젠가 나라는 개체가 비로써 존재할 수 있게 될 때, 나라는 새로운 구슬 하나를 그 그물에 더해 넣을 수 있게 될까. 

질문의 꼬리는 논리의 공간을 넘어 초논리의 공간으로 길게 늘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