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을 향해 곧게 서 있는 유리창의 표면에 투명한 방울들이 둥그렇게 맺혔다가 이내 중력에 순응하여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다. 빗방울이 굴절시킨 세상은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일그러진 그 형상이 원래의 제 모습이었던 양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길거리를 오가는 군상의 움직임조차 외면하고 싶어지는 이른 아침의 한 때가, 넓어진 하구에 다다른 물살의 늘어진 흐름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선명함보다는 일그러진 형상이 아침의 심사를 편하게 만들고 있다니.”
빗방울은 한쪽 면을 잘라낸 구슬처럼 유리의 표면에 달싹 달라붙었다가 구불구불 흘러내리기를 뫼비우스의 띠에 빠진 다람쥐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
“그는 지금도 그곳에서, 돌을 굴려 산을 오르고 있겠지.”
연관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 시지프스의 이야기라도 끄집어내어 기어이 붙여 본다.
옅은 갈색의 홍차를 말갛게 우려내다가 승천하는 뽀얀 수증기의 뒤를 따라 수미산의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 오른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발아래를 바라보는 일이라니, 산은 사람에게 겸손해지라고 말하려나 보다. 한참을 걸어 오르다가 보니 이윽고 수미산의 정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머리를 두리번거리기도 전에 괜한 혼잣말이 먼저 새어 나온다.
“저기가 선견성인가 보다.”
• 수미산(須彌山): 불교(佛敎)의 우주관(宇宙觀)에서 세계(世界)의 중앙(中央)에 솟아 있다는 산(山).
• 선견성(善見城): 수미산의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제석천(帝釋天, 인드라)이 거처(居處)하는 천궁(天宮) 또는 성(城)
• 도리천(忉利天):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천(六天)의 제2천(둘째 하늘).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곳으로, 가운데에 제석천(인드라)이 사는 선견성(善見城)이 있으며, 그 사방에 권속 되는 하늘 사람들이 살고 있는 8개씩의 성이 있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무수한 구슬을 바라보던 눈길에 잔 먼지 끼어 있는 생각의 파편들이 말갛게 걸려 나온다. “[인드라망](산스크리트로 인드라얄라(indrjala))이라 불리는 [인드라의 그물]은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어느 날엔가 지나가던 바람이 슬쩍 얘기해 준 것 같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인간의 세상’과 ‘만물의 세상’을 포괄적으로 통칭하는 것이다.)
고대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수미산의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중앙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에 속한 천신(天神)들의 왕인 인드라(한국말로는 제석천)가 사는 궁전인 선견성(善見城)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궁전의 위에는 인드라망이라는 그물이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것의 그물코마다에는 보배구슬이 무수히 달려 있어 거기에서 나오는 빛들이 서로 겹쳐 비추면서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한다.
• 욕계(欲界/慾界): 삼계(三界)의 하나. 유정(有情, 마음을 가진 살아 있는 중생)이 사는 세계로 지옥ㆍ악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육욕천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있는 유정에게는 식욕, 음욕, 수면욕이 있다.
• 삼계(三界): 중생이 생사 왕래하는 세 가지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욕계, 색계, 무색계가 이에 속한다. 삼계는 불계(佛界), 중생계(衆生界), 심계(心界)를 말하기도 하고 전세(前世), 현세(現世), 내세(來世)를 말하기도 한다.
인드라망에 달려 있는 그 구슬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각각의 구슬 하나는 다른 모든 구슬을 비추고 있고, 그 하나의 구슬은 또한 다른 모든 구슬에게 비쳐지고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즉, 인드라망에는 어느 한 구슬에 비친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에 거듭 비치는 무한의 관계가, 마치 마주한 두 개의 거울에 비친 서로의 모습처럼 거듭해서 끊임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구슬에 변화가 생기게 되면 인드라망 전체에 걸려 있는 다른 구슬들에 비친 그 구슬의 모습이 변하게 되기 때문에, 인드라망에서는 구슬 하나의 변화가 곧 전체 구슬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인드라망의 그물코에 달려 있는 하나의 구슬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드라망의 관점으로 본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가깝든 멀든 서로가 서로의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의 구슬 서로는 다른 구슬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드라의 그물(인드라망)에 달려 있는 구슬들의 이러한 관계를 통해 세상 만물의 존재 방식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인드라망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종교적 의미를 떼어내고 인드라망을 얘기하게 되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관된 작용을 통해서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중생의 바람은 수미산을 떠나 욕계로 내려온 이 인드라망에게 온갖 다양한 상상과 억측을 불어넣고 있지만 인드라망의 본연은 ‘세상 전체를 끝없이 덮고 있는 가없이 넓은 인연의 그물’이란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무수히 많은 구슬과 그물의 형상이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인드라의 그물, 즉 세상의 모습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드라망은 끊임없이 서로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 즉, 부처가 온 세상 구석구석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