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땅에 큰 눈이 왔다는 소식에 이십 여년 전, 광주에 적을 두고 살았던 시간이 떠오른다. 해남이며 고창이며, 하라는 연구는 안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돌아다녔던, 참 좋은 시절이었다. 경상도 사림인 내가 전라도로 내려간 것은, 그냥 그곳이 좋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겨울이면 그곳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고창 선운사며 내장산 백양사며, 참 눈이 많았다는, 눈 내리는 날이면 그곳을 찾아 나서곤 했다는, 이미 색 바래어진 오래된 추억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눈이 조금 그쳐가는 저녁 무렵이 가장 좋았다.
그참, 비록 태평양은 건너 왔지만 이곳도 눈 많긴 마찬가지인데, 그 시절 그곳의 눈이 더욱 아름답고 더욱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은, 중년이란 단어가 새겨놓은 괜한 나이테의 심술 때문일 수 있다.
다시 펑펑 눈 내린 날, 발목 위까지 쌓인 눈을 밟으며, 인적 없는 그곳을 돌아다닐 수 있을까. 파리한 가로등 불빛에 은청색으로 빛나는 그곳의 눈을 가슴이며 눈동자를 한껏 열고 받아들이는 날이 다시 올까.
일단 일어난 생각은 저녁의 그림자처럼 등 뒤에 길게 늘어지기 마련이다. 지리산을 오르내리던 더 젊은 날의 시간까지 닿으려 한다.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 본다. 왜 저렇게 높은 곳에 달았을까. 분명 내가 한 일이지만 알 수 없다.
어쨌든 다른 하루가 시작된 지 2시간 가량이 지났다. 깊은 잠을 청하기는 틀린 날이란 걸 안다. 젠장, 혼자 밤새 청승이나 떨어야 겠다.
(내일이면 이곳 뉴욕도 체감온도가 영하 21도까지 내려간단다. 겨울 지리산을 올랐을 때가 이 정도였을라나,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