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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유희, 진정으로 인간을 지혜롭게 하는

지적유희, 진정으로 인간을 지혜롭게 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가다 보면,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다가 보면, 지혜로워진다는 것의 어려움을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아차리게 된다.

책상 위에는 늘 몇 권의 책이 펼쳐져 있고 글쓰기와 글 읽기, 사색하기와 산책하기에 시간을 아끼지 않는 ‘지적(知的)인 인간’이라 해도,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고 답일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그 과정에서 떨어진 파편들을 주워 담아 가는 일은, 비록 그것이 지적본능을 따르려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혜로워진다는 것이 ‘제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지적비밀을 알아차린 이상에는, 그것을 향하려는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못하게 된다.

바위에 새겨 넣은 듯 선명하게 남겨진 ‘정답’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세월의 나이테에 온몸이 칭칭 휘감기다가 보면 직감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생각하며 길을 걷는 것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운명’이라는 것을, 이제라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지금의 이 길이 ‘생각하는 자’가 걸어야만 하는 지식의 저잣거리이고, 휘적휘적 두 팔을 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이 행위는 ‘생각하는 자의 지적유희’이다.


지적유희의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인간에게는 왜 지적유희가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왜 지적유희를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지혜는, 지식의 지적유희를 통해서 다듬어져야만 비로소 제 모습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지식이 지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은 지혜를 만들어내는 원재료이기에 ‘지혜를 깨닫는 것은 지식을 얻어가는 것’에서부터 비롯되게 된다.

혹자들은 이 ‘지적유희’를 ‘사색’ 또는 '사유'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것을 사색이라고 부르든 또는 사유라고 부르든 지적 유희의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지적유희는 가슴의 떨림과 영혼의 울림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오직 생각하는 자만이 누리고 있는 정적인 행위이다.

철학자이자 작가, 작곡가였던 루소(장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28 June 1712 – 2 July 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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