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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파리

반 고흐의 파리

생전에 반 고흐는 그야말로 무명화가였다. 흔히 ‘반 고흐의 파리 시기’라고 부르는 1886년 3월 - 1888년 2월에도 그는 무명화가였으며 파리를 떠난 후에도 줄곧 무명화가로 살아가다가 1890년 7월 29일에 파리의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무명화가로 사망하였다.


반 고흐의 회화기법은 컬렉터들과 평론가들, 예술가들과 같은 당대 파리의 화단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 고흐의 영혼과 손이 창조해 낸 회화적 기법은 그야말로 ‘예술적 혁신’(artistic innovation)이었으며, '예술적 진화'(artistic evolution)였고, '예술적 진보'(artistic progress) 그 자체였다. 하지만 반 고흐의 예술은 화단은 물론 대중의 주목조차 받지 못하였다. 살아있는 동안 반 고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일개 무명화가에 불과하였다.


예술을 얘기함에 있어 ‘대중’이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단(畵壇, 미술계, art circle, art world)을 언급함에 있어 대중이란 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의 조예를 갖춘 ‘예술에서의 대중’을 말하는 것이지, 예술에 무지한, 또는 예술작품을 벽이나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필요한 소품 정도로만 여기는 ‘일반 대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 고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남부의 아를르에서도, 파리의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도. 일반 대중의 눈에 반 고흐가 그린 작품들은 그저 신기하고 괴기하게만 보였을 것이다. 일반 대중의 눈에 회화작품은, 사진을 인화한 듯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서는 이상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반 고흐의 그림은 일반 대중에게는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단지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모네나 피카소가 행여 그들의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들 일반 대중은 신기함이나 특이함, 이상함만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개중에는 ‘이상하긴 하지만 예술가라니깐 그럴 수도 있는’, ‘혹시 공짜로나 아주 싼 값에 준다면 집안 어딘가 구석진 벽면에 걸어둘 만한 것’ 정도로 여긴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 α ――――――

반 고흐가 1987년(파리 시기)에 그린 <몽마르뜨 언덕의 채소밭>


파리에서 반 고흐는, 화가로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거의 극한’의 상황에 빠졌다. 파리의 화단은 반 고흐를 외면하고 배척하였다. 사실 화단의 관계자들은 ‘반 고흐의 예술’에 대해 관심 자체가 아예 없었기에 굳이 배척해야 할 이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반 고흐에게는 ‘배척’과 ‘외면’이란 단어가 자신의 처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믿을만한 상황이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파리의 반 고흐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더 이상 파리에 머무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파리를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반 고흐는 알아차렸다. 당시 반 고흐에게는 ‘의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한낱 ‘정신적인 사치’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이제 파리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스트레스만을 더해가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시 예술과 문화의 도시 파리는 지금의 뉴욕과 같이, 누구나에게 열려 있었지만, 두 손을 벌려 그들 모두를 환영하는 파라다이스는 아니었다. 19세기말의 파리는 누구나 성공을 꿈꾸고 쟁취할 수 있는 ‘꿈의 도시’였지만 그 성공은 오직 ‘선택된’ 또는 ‘기회를 잡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화가 반 고흐는 파리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상황이 점점 그렇게 돌아갔기에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 고흐는, 파리에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였고, 지금은 자신의 때가 아니기에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아무튼 그즈음에 반 고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파리를 떠나는 것’ 밖에는 없었다.


파리를 벗어나야만, 파리의 화단에서 멀리 떨어져야만 자신의 회화세계에 더욱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 고흐가 파리를 떠나 아를르로 간 것은, 파리 화단으로부터의 고립이 원인 중에 하나였다. 고립은 반 고흐의 정신질환을 발현 내지는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화가 반 고흐를 탈진시켰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파리라는 도시는 당대의 예술가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파리를 향한 예술가의 회귀본능은, 결국에는 반 고흐를 파리의 근교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가도록 만들었고, 반 고흐는 그곳에서 영원한 잠에 들었다. 지금도 반 고흐는 그곳 들판에 서서 저 멀리에 걸쳐져 있는 파리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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