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는 고흐라는 '일가의 성씨'(family name, surname, last name, 성(姓))나 빈센트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given name)으로 기억되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는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파 화가(Post-Impressionists)이다.
고흐는, 초기(1885년 이전)에는 그의 모국 네덜란드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후기(1886년부터 사망하던 해인 1890년까지)에는 프랑스의 몇 개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고흐의 대표작 대부분이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대부분의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고흐를 네덜란드 화가(Dutch painter)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작품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리와 아를르, 생 레미, 오베르 쉬르 우아즈 같은 프랑스의 지역명들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이자 화가로서 고흐의 행적은 사실 네덜란드에서보다는 프랑스에서 더 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십 대 중반부터 그림 중개상의 조수, 언어 교사, 기독교 전도사 등과 같은 몇 가지 직업을 경험했던 고흐는 1880년 이십 대 후반에 가서야 화가에 뜻을 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가에 뜻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는 것’에는, 그림 그리는 일을 취미생활로 삼는 화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일을 전업인, 즉 그림 그리는 일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전문적인 화가가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것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고흐는 1885년까지, 목사였던 아버지가 재직하고 있었던 네덜란드의 누넨에서 그림을 그렸다.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 1885,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과 같은 작품을 통해 네덜란드 시절 고흐의 주된 주제였던 ‘어두운 색채를 통해 표현한 곤궁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 군상’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 고흐의 그림은 이십 대에 그가 전도사로 지냈던 탄광촌 사람들의 삶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Vincent van Gogh
1885, 82 cm×114cm, Van Gogh Museum, Amsterdam
화가 고흐에게는 두 개의 모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태생적 모국이면서 또한 화가의 뜻을 품고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나라 네덜란드이고, 다른 하나는 화가로서의 꿈을 구체화시킨 문화와 예술의 나라 프랑스이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파리에서 고흐는 인상파와 신인상파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이것을 통해 고흐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 남부 아를르(아를, Arles)로 간 고흐는 꼼꼼한 붓의 터치로 사물을 불타는 듯 이글거리게, 또는 소용돌이치는 듯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흐의 화풍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아를르는 남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州) 부슈뒤론현에 속하는 인구 약 오만의 소도시로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에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아를르는 프랑스의 작가 알퐁소 도데의 희곡 <아를르의 여인>(1872년 초연, 보드빌극장)과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관현악곡 <아를르의 여인>(1872년 작곡)에 의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또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고흐가 사랑한 마을’이란 이름으로 더욱 유명하다.
어쩌면 아를르의 카페며 골목길을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고흐의 삶과 붓의 터치는 느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영혼까지 떨게 만든 극도의 고독과 궁핍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뜨겁게 불태웠던 비운의 화가 고흐가 머물렀던 마을 아를르가, 어떻게든 가봐야 할 ‘미술애호가의 성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고흐의 예술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의 증가’로 인한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것은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천재 예술가의 비극적인 삶을 측은지심으로 들여다보면서 자기 자신의 영혼이 치유되기를 원하는 ‘타인으로서의 이기심’ 때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흐가 사랑한 마을 아를르에서는, 인간이란 타인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을 통해, 그것이 비극적이면 비극적일수록, 더욱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아주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본성은 결코 바뀌지 않는 법이다. 예술은 인간이라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형이상학적인 행위이기에 인간의 이기심 속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야만 한다는, 태생적 운명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적이지 못한 예술가는 흔히 자신의 당대에서는 배를 곯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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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Dutch Republic) 화가라는 측면에서 고흐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화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5 July 1606 – 4 October 1669)는 네덜란드의 레이던(Leiden)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사망한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다.
렘브란트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의 적극적인 사용을 통해 <야경>(The Night Watch, 1642)과 같은 바로크 최고의 걸작품들을 남겼다. 음영법 또는 명암법이라고도 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광선에 의해 나타나는 묘사 대상의 밝고 어두운 관계를 캔버스에 표현하는 기법으로, 빛과 어둠의 대비와 배합을 극적으로 이용하는 바로크 회화의 대표적인 기법이다. 회화예술에서의 바로크 시대는 16세기말부터 17세기 초에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 카라바조로(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부터 시작되었다.
렘브란트의 <야경>
<The Night Watch>, Rembrandt van Rijn
1642, 363 cm×437cm, Amsterdam Museum, Amsterdam
서양미술사에서는 고흐를 19세기에 활동했던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폴 고갱,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툴루즈 로트렉, 베르트 모리조, 귀스타브 카유보트, 프란시스코 고야 등과 같은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현대 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후기 인상파의 거장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흐의 작품은 생전에 단 1점만이 거래되었을 뿐이다. 살아 있는 고흐는 당대의 미술계와 화단이 철저하게 외면한 무명의 화가였다. 몇몇 화가들의 관계자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고흐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동생 테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자는 기본적인 생계조차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이나 고흐의 삶은 빈곤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듯 살아서는 완전한 무명이었던 고흐가, 죽어서는 서양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던 고흐의 작품이 이제 와서는 물리적인 보석보다 더 소중한 대접을 받고 있으니,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이성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불가해한 공간이다.
어쨌든, 고흐를 알아가는 일, “빈센트 반 고흐 그는 누구였나,”는 여기에서부터가 시작이다. 짧지만 복잡다단했던 그의 삶과 작품세계는 길지 않은 문장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믿으려는 존재이기에 그 짓을 계속해서 저지르게 된다. 이제 별과 바람과 구름과, 꽃과 들풀과 밀밭과, 흙 묻은 신발과 사람의 초상이 하늘과 땅에 지천으로 소용돌이치는 사유의 들판에 발을 디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