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직업은 무엇이었나

빈센트 반 고흐의 직업은 무엇이었나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던 후기 인상파 화가이다. 빈센트는 네덜란드 남부 노쓰 브라반트(North Brabant, 비공식적으로는 Brabant라고도 불리고 있다.) 지역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Zundert)에서 출생하였으며 프랑스 파리 인근의 전원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서 사망했다.

사실 빈센트가 화가로서 프랑스가 주된 활동무대였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생전에 빈센트가 가졌던 화가로서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활동했다.”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문장을 사용하기보다는 “지독하다고 할 만큼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가로서의 경력은 짧다. 빈센트를 화가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기간은, 1880년 화가가 되겠다는 뜻을 세운 때부터 사망한 해인 1890년까지, 길게 잡더라도 단 10년에 불과하다. 프랑스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1886년 무렵 이후부터를 화가로서의 주된 경력으로 본다면 그마저도 더욱 짧아진다. 이 기간이, 채 삼십팔 년(정확하게는 삼십칠 년과 4개월)이 되지 않은 빈센트의 삶(1853.3.30 - 1890.7.29)에서는 짧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활동했던 다른 예술가들의 경력과 비교해 보자면 짧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남부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빈센트는 화가가 되기 전까지 미술상의 조수와 언어 교사, 서점 점원과 선교사, 전도사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었다. 이에 대해 "전전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문헌들이 있는데 "전전하다."라는 표현이 가진 피동성을 감안해 보면 "가졌었다."라는 능동적인 의미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말은, 빈센트가 당시 여러 가지 직업을 옮겨가며 가졌던 것에는 그의 성향에 따른 선택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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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당연한 걸 왜 묻는 거지?”라는 생각에 고개마저 갸우뚱하게 될 수 있다. 그것은, 주로 고흐라는 일가의 성씨(family name)만으로 불리고 있는 빈센트의 직업은 두말할 나위 없이 ‘화가’ 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후기 인상파 화가 고흐’라는 문장이 언젠가부터 하나의 고유명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빈센트의 직업을 화가라고 말하는 것에는 일말의 그릇됨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쫓기 위해서는 1853년 생인 빈센트의 경력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빈센트는 1869년부터 1876년까지 약 7년 동안 네덜란드의 도시 헤이그(The Hague, Den Haag(덴하흐))에 있는 [구필 앤 씨 갤러리](Goupil & Cie gallery)의 미술상이었던 구필의 조수로 있으면서 헤이그와 런던, 파리에서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거래하는 일을 경험하였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점은 빈센트의 첫 번째 직장은 갤러리였다는 것이다. 또한 빈센트가 헤이그에서 첫 직장을 가진 것은 당시 헤이그가 네덜란드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헤이그는 네덜란드의 저지대 지역인 서쪽 북해 연안에 위치한 자위트홀란트주의 주도이자 정부 소재지이며 현재는 네덜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광역 대도시권을 이루고 있는 도시이다. 네덜란드 왕국의 공식적인 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정부 청사가 있는 헤이그가 실질적인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헤이그는 또한 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형사재판소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고흐사진(21살).JPG

<스물하나의 빈센트 반 고흐 사진>, 1873

1873년 당시 고흐는 헤이그(Hague)에 있는 [구필&씨 갤러리](Goupil & Cie gallery)에서 미술상 구필의 조수로 일하였다. 사진 속의 빈센트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자화상>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오래된 흑백사진 속 빈센트의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고 피부에는 윤기마저 흐르고 있다. 젊음의 파릇함이 느껴진다. 화가가 된 후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 사진과는 크게 달라진 빈센트의 모습에서, 물론 그 차이는 나이 먹음으로 인한 것도 있겠지만, 곤궁하기만 했던 무명 화가 빈센트의 삶이 더욱 안쓰러워진다.


빈센트가 [구필 앤 씨 갤러리]에서 근무했던 기간은 나이로는 일 일곱 무렵부터 스물넷 무렵까지 약 7년 정도이다. 이 기간을 현재의 교육 시스템과 연계 짓게 되면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교 교육을 완전하게 이수하는 시간에 해당한다. 한 사람의 삶에 있어 이 기간은, 인격과 가치관을 형성하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빈센트는 이 중요한 시기에, 무려 7년이란 시간 동안을 갤러리에서 생활하며 미술작품들을 들여다보았고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한 것이다. 십 대를 넘어 이십 대에 들어서면서 빈센트는 미술에 대한 자신만의 안목을, 물론 아직까지는 선명하지 못했겠지만, 그 시기에 갖추어 갔을 것이다.

이어서 빈센트는 영국에서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교사로 생활하였으며,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지역에서는 기독교 전도사로도 사역하였다. 빈센트가 전도사로 사역한 것에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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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의 경력을 놓고 생각해 보면 그가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에는 십 대 중후반 무렵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를 갤러리에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보냈던 약 7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갤러리가 직장이라고 해서 누구나 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빈센트 반 고흐'이다. 빈센트의 첫 직장이 갤러리였다는 것은, 빈센트를 회화작품의 세계로 이끌고자 한 신의 예비이자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빈센트와 파리 화단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빈센트가 파리로 거처를 옮겨 간 것에는 이 시기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1880년에 그의 나이는 이미 스물일곱이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네덜란드에서조차 무명화가에 불과했던 빈센트가 새로운 활동 무대로 삼은 것은 '문화와 예술의 중심 파리'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이 넘었다.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빈센트가 화가로서 성공을 거두기에는 네덜란드에서도 파리에서도, 완전히 늦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적절한 때였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였다. 무명화가에게 파리는 꿈의 도시일 수 있지만 또한 결코 넘지 못할 산과 같은 도시였다. 빈센트는 늦은 나이였지만 그 산을 넘기로 작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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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빈센트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대게의 사람들은 빈센트 반 고흐의 직업을 화가라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고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빈센트가 화가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는 사실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빈센트의 직업’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직업’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을 말한다. 빈센트의 직업을 화가라고 말하게 되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직업과는 거리가 생기게 된다. 그 이유는, 생전에 빈센트는 그림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생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일정 기간 계속해서 종사’ 한 것은 맞지만 그의 그림을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며’ 찾는 사람이 없었기에(생전에 단 한 점만이 팔렸다고는 하지만 이마저도 그것에 얽힌 사연이 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빈센트의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지 못했다.


아울러 사전에서는 화가를 ‘그림 그리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표현의 의미는, 화가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직업으로서 그림을 그려서 그것을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빈센트의 직업을 화가였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빈센트를 말함에 있어 ‘위대한 후기 인상파 화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는 아무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손을 빌어 탄생한 그림들은 비록 화가 자신에게는 아무런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화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나 커다란 부를 안겨주고 있다. 세상이란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포장해서 판매하는 사람에게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는, 원래부터 이상한 곳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재주를 부린 곰은 고독과 굶주림 속에서 이른 나이에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 곰이 부린 재주의 결과물을 소유한 사람들은, 곰의 요절이 오히려 커다란 부를 챙겨주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그리고 그 곰에게는 ‘시대를 잘못 만난’, ‘시대를 너무 앞서간’, ‘불운한 천재’라는 상투적인 수식어 붙이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표현의 능력은 사실 그리 창의적이지 않다. 그래서 빈센트에게 붙어 있는 수식어들을 다른 예술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가, 흔히 카라바조(카라바지오, 까라바조)라고 불리고 있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 - 1610)이다. 카라바조에게 붙였던 수식어들을 빈센트에게 다시 붙인 것인지, 빈센트에게 붙였던 것들을 세월을 되감아 카라바조에게 붙인 것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어쨌든 빈센트와 카라바조 두 사람은, 시대를 앞선 천재이자 불운한 천재이며 요절한 천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카라바조_초상화.JPG

<카라바조의 초상화>, Chalk portrait of Caravaggio by Ottavio Leoni, c. 1621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어떤 논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더라도 빈센트 반 고흐는 화가이다. 그는 예술사에 굵고 큰 획을 쭉 그어 넣은 위대한 회화작가이다.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직업을 화가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직업의 개념을 좀 더 넓힐 필요가 있다.

‘화가란, 그림 그리는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심을 다해 그것에 매진하는 예술인’인 것이다. 그의 경력이나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예술애호가들이 기억하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에 불운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후기 인상파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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