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자취를 따라서

반 고흐의 자취를 따라서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날짜로만 보게 되면 ‘완연한 봄’이어야 하지만 북유럽의 기후 특성상 아직은 겨울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다소 어정쩡한 계절이 3월이다. '빈센트'는 약 1년 전에 태어났던 형의 이름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형 빈센트는 태어나서 수일 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다음 해에 태어난 빈센트는 형의 이름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빈센트 반 고흐]가 되었다. 빈센트의 부모님에게는 빈센트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아들이 있는 셈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빈센트'의 이름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반 고흐가 ‘출생부터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었다고 일부 문헌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19세기라는 시대적 환경에 대한 이해부족이 불러온 오해이다.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무척 높았기 때문에 죽은 형의 이름을 뒤이어 태어난 동생이 물려받은 것이 그리 ‘흔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로 인해 반 고흐에게는 ‘형’이라는 ‘본 적도 없는 혈육의 존재’가 태생적으로 투영되어 있었다.


19세기의 네덜란드를 살아갔던 여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성인으로 성장한 반 고흐는 파리를 거쳐 화가들의 이상적인 집단생활을 꿈꾸며 남프랑스 아를르에 그의 작업실을 마련하였다.

화가 반 고흐의 머릿속은 오직 그림으로만 채워졌으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생전에 딱 한 점의 작품만이 팔렸는데 그나마도 친동생인 테오 반 고흐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산 것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 말고는 반 고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 고흐 스스로가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파는 것뿐이었지만 그의 그림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반 고흐는 그리고 또 그렸다. 방값이며 식비에 술값, 물감과 화구를 살 돈까지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동생 테오는 반 고흐의 유일한 후원자였다.

사실 이런 상황이라면 반 고흐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고 해도 ‘제정신’으로 살아가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반 고흐는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반 고흐는 [압생트]라는 술을 즐겨 마셨는데 당시 이 술은 도수가 70도를 넘는 독주 중에 독주였다.

압생트는 식용 알코올에 설탕과 향쑥, 살구씨, 회향, 아니스등과 같은 식물성 향료를 섞어 만든 혼합주로 중독성과 환각성이 있어 현대에 와서 제조와 판매가 금지된 술이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압생트]는 도수와 성분 면에서 반 고흐가 생전에 마시던 것과는 차이를 가진 '완화된 술'이며 당시의 향수를 느끼고자 하는 이들이 찾는 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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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밤의 카페>, <The Night Café>, 1888.

72.4 ×92.1cm, Yale University Art Gallery, New Haven, Connecticut


돈이 없으니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고 빈속에 마신 독주는 반 고흐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반 고흐는 ‘밥 대신에 술’을 선택했다. 당시 반 고흐의 상황이라면 ‘그렇게라도 해야만’ 현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반 고흐는 ‘언젠가는 나에게도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고 여겼을 터이지만 그에게는 오직 냉랭한 겨울바람만이 불어올 뿐이었다. 반 고흐의 1888년 작품 <밤의 카페>의 배경인 카페는 실제 그가 술을 마시던 장소였다.


그림 한 점 팔지 못하고,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무명화가 주제에 밤마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 술을 마신 것에 대한 세속의 평가는 결코 고울 수 없는 노릇이다. 동생 테오가 보내준 돈은 물감을 사고 술을 마시는데 오롯이 흘러들어 갔다. 천재예술가에게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잣대를 마련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반 고흐가 살아간 방식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든 그것은 보는 이의 몫일뿐이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든지 간에 반 고흐는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오직 그림만을 생각하고 그림만을 그리다가, 이십 세기가 시작하기 약 10년 전인 1890년 7월 29일에 세상을 떠나간 한 사람의 화가라는 것과, 사람들은 그를 ‘불행했던 천재화가’라고 부른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 α ――――――


반 고흐는 아를르에서 폴고갱과 함께 [화가공동체]를 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화가공동체는 반 고흐가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구현을 위해 노력했던 유일한 사회적인 일이었으며 반 고흐는 그 일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반 고흐는, 화가공동체를 통해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에서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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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1888년 작 <밤의 카페, 아를르>

Paul Gauguin <Night café, Arles>, 1888, 73 x 92cm

Pushkin Museum, Moscow, Russia

단골 카페의 주인이었던 지누 부인(Madame Ginoux)을 모델로 그린 두 가지 버전의 <아를르의 여인>(<L'Arlésienne>)과 폴고갱(Paul Gauguin)의 <밤의 카페, 아를르>(<Night café, Arles>, 1888, 73 x 92cm, Pushkin Museum, Moscow, Russia)는 1888년 아를르에서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할 때 그린 작품들이며 이들 작품들은 반 고흐가 특별하게 애착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화가공동체를 구성하려는 반 고흐의 꿈은 결국 무산되었다. 반 고흐와 폴고갱은 영원히 갈라섰고, 이로 인한 분노와 슬픔은 반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르도록 만들었다.


이 사건 이후 반 고흐는 아를르를 떠나 스스로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약 1년여간의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당시의 정신과 치료는 말이 치료이지 가혹행위나 고문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반 고흐는 어렵지 않게 적응하였다고 한다. 하긴 반 고흐에게는 삶 자체가 누구보다 힘겨웠었기에 정신과 치료 또한 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병원을 나온 반 고흐는 파리의 근교에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라는 마을에 거처를 정했다. 병원을 나왔다는 것에서 증세의 ‘완치’를 기대할 수 있지만 실상은 증세가 ‘완화’되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에 반 고흐가 가장 원했던 것은 ‘안정된 휴식’이었을 것이다. 안정된 휴식만이 그림 그리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반 고흐의 그런 의도가 찾아낸 전원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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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아를르의 여인> 첫 번째 버전: <지누 부인의 초상화>

<L'Arlésienne>(also known as <Portrait of Madame Ginoux>)

1888, 92.5 × 73.5cm, Musée d'Orsay,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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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아를르의 여인> 두 번째 버전: <책과 함께 있는 지누 부인>

<L'Arlésienne: Madame Ginoux with books>, 1888,

91.5 x 73.7cm, The MET(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한 반 고흐는 [라부 여관]을 거처로 삼았다. 반 고흐가 라부 여관에 짐을 푼 것을 두고 ‘당시 라부여관이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가장 싼 숙소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살제로 가보게 된다면 그들의 말에 수긍하기 어렵게 된다. 라부여관은 마을 청사 건물에서 바로 길 건너편이자 마을의 중심가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숙박과 레스토랑이 결합된 복합적인 건물이다. 중심가와 떨어진 외진 곳으로 들어간다면 좀 더 저렴한 숙소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고, 마을의 골목길 안쪽에서는 하숙과 같은 형태의 숙소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반 고흐는 라부여관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길지 않았던 생을 마감하였다. 라부여관은 현재 관광명소가 되어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당시 반 고흐가 머물렀던 방을 관람할 수 있게 해 준다.


―――――― α ――――――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반 고흐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반 고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70일 간을 머물면서 72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때 그린 그림에는 <오베르의 교회>와 <가쉐박사의 초상화>(사실 이 작품은 <의사 가쉐의 초상화>라고 번역해야 하지만 의사를 뜻하는 단어인 ‘Doctor’을 그냥 ‘박사’라고 번역한 것이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등이 있다.


아침이면 라부여관의 1층 레스토랑에서 수프에 마른 빵을 먹었다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 아침식사가 반 고흐의 유일한 하루식사였다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반 고흐는 마을의 골목길이며 교회며 사람들을 그렸다. 또한 뒷동산의 들판에 올라 밀밭과 나무와 하늘과 별과 구름을 그렸다.


당시 반 고흐의 주치의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닥터 가쉐(의사 가쉐)는 한 때 그의 심리상태가 안정돼 보인다고 진단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아주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하루 한 끼의 식사와 빈 속에 마시는 독주, 유화물감의 독한 기름 냄새, 팔리지 않고 쌓이기만 하는 그림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궁핍은 반 고흐의 더욱 증세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결국 마지막 작품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 또는 <나무뿌리와 둥치>(<Tree Roots and Trunks>)를 남기고 반 고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정리하였다.(삶을 포기하였다고 한다면 너무 슬퍼질 것만 같아 삶을 정리하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마을의 뒷동산 밀밭길 어디쯤에서 자신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에 놀란 검은 까마귀들이 푸드덕 무리를 지어 허공으로 날아올랐을 것이고, 하늘의 구름은 소용돌이를 쳤을 것이며, 저 멀리에 있는 삼나무는 나뭇잎을 쭈뼛 세웠을 것이다. 피를 흘리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라부여관의 방으로 돌아온 반 고흐는 좁고 낡은 침대에 야윈 몸을 뉘었고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결국에는 숨을 거두었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는 반 고흐의 장례식을 거부하였고, 너무나도 가벼운 그의 몸은 짐수레에 실려 마을 뒷동산에 있는 공동묘지의 한쪽 구석에 묻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마을 공동묘지가 아주 양지바르다는 것이고 더욱 다행인 것은 반 고흐가 묻힌 곳이 그가 그림을 그리던 들판에서 아주 가깝다는 것이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돌아다니다가 보면, 정신병원을 나온 반 고흐는 이곳을 처음부터 영원한 안식처로 여겼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파리와 가까운 이곳이라면, 이렇게 아늑한 곳이라면 영원한 쉼에 든다고 해도 괜찮겠다고 여겼지나 않을까.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지낸 70일 동안 72점의 작품을 그렸으니,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을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이곳의 하늘과 들판에서는 반 고흐의 새로운 그림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된다.


by Dr. Franz Ko(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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