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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삶과 문학, 그리고 베아트리체

단테의 삶과 문학, 그리고 베아트리체 

    

13세기 말과 14세기 초반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단테(Dante, c. May 1265 – September 14, 1321)는 시인이자 산문 작가이며, 문학 이론가이자 도덕 철학자이면서 정치 사상가이다. (Italian poet, prose writer, literary theorist, moral philosopher, and political thinker)


1265년 5월경에(between May 21 and June 20) 피렌체의 알리기에리(Alighieri)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1321년 9월 13일(또는 14일) 라벤나에서 사망하였다. 일부 문헌에서는 단테가 태어난 것을 1265년 3월경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아무튼 그의 일가(一家)의 성(姓)인 알리기에리(Alighieri)를 포함한 그의 이름은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이다. Dante 또는 Dante Alighieri라고 그를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어식 표기에 따른 것이고 그가 태어나서 활동했던 이탈리아어에서의 이름은 Durante di Alighiero degli Alighier이다. 애초 부모님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은 단테가 아닌 [두란테](Durante)인 것이다. 


알리기에리 가문은 귀족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는 임대업과 대부업으로 생계를 이끌었는데 단테가 태어나서 성장할 무렵에는 가세가 상당히 기울었다고 한다. 정황상 알리기에리 가문은,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낮은 계층의 귀족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낮은 계층’이란, 어디까지나 경제력에 따른 ‘사회적 계층’을 말하는 것일 뿐이지 절대적인 계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사회적 계층이 결정되는 것은 인간이 살아온 어느 문화권에서나 있어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성장과정에서 단테는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브리태니커의 기록에 따르면, 단테가 4세(1269년)가 되기 전에 어머니 벨라(Bella)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십 대 후반이었던 1280년대(1283년 전으로 보고 있다.)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단테의 어머니인 벨라는 그녀의 이름만이 알려져 있고 가문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성을 알 수는 없다. 또한 단테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년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어 정확한 해를 특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단테는 장남이었기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물이 되기 전에 알리기에리 일가의 가장이 되었다. 다행히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을 만큼의 유산은 물려받았기에 단테와 남아 있는 가족들이 살아가는 것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 십 대에 경험한 부모님의 연이은 죽음은, 그런 일을 겪게 되면 누구나 그렇게 되겠지만, 단테의 가슴과 영혼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십 대 초반에 경험한 베아트리체의 죽음은, “인간은 왜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 이후의 세상은 어떤 것인가.”, “죽음과 신은 어떤 관계인가.”와 같은 신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 ***     


1274년의 5월에 열린 5월제 축제에서 9살의 단테는 아주 특별한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소년 [단테 알리기에리]가 소녀 [폴코 베아트리체]를 만나 첫눈에 반한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피렌체의 유력 인사인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로 단테보다 몇 달 어린 거의 동갑의 소녀였다.  


9살의 단테가 9살의 베아트리체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던 13세기의 결혼관습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3세기를 살아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지금의 우리들과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아주 짧았다. 따라서 자식을 낳고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야만 했다. 10대 초반이 되면 결혼에 관계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해서, 대부분의 경우 스물이 되기 전에 정식으로 결혼해서 스스로의 가정을 꾸려야만 했다. 당시의 결혼에는 ‘결혼하는 당사자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는 없었다. 당사자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결혼이란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들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당시의 결혼관습에 따라 부모님들끼리 결정한 상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단테는 1277년경에 피렌체의 또 다른 귀족인 마네토 도나티의 딸인 젬마 도나티(Gemma Donati)와 약혼하였는데 당시 단테는 12살 젬마는 9살(또는 10살)이었다. 그들은 단테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즈음인 1283년경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단테가 결혼한 해를, 일부 문헌에서는 단테가 21살이 되던 해인 1286년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단테가 젬마와 약혼한 해가 1277년이고,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은 1274년이다. 따라서 단테가 젬마와 약혼할 당시 이미 그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에 푹 빠져 있는 상태였다. 단테의 가슴과 영혼은 오직 베아트리체를 향해 있었지만, 단테의 몸과 눈은 젬마를 향해야만 했다. 


당시 귀족 집안에서의 결혼이란 현실을 기반으로 한 집안끼리의 맺음 행위였다. 결혼을 통해 두 집안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신분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 또한 서로에게 부합되어야만 했다. 베아트리체의 집안은 피렌체 최고의 가문 중에 하나였기에 단테의 집안과 맺어진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테와 마찬가지로 베아트리체 역시, 그녀의 부모님이 맺어준 다른 명망 있는 가문의 아들 시모네 디 발디와 결혼하였다.   


*** ***     


1283년 단테는 베아트리체와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그 만남의 진위나,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단테는 그날 아르노 강의 다리 위 또는 피렌체의 거리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났고(또는 그저 바라만 보았고), 그날 밤 꿈속에서 베아트리체와 함께 사랑의 신을 만났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을 담은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단테는 귀족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기에 열여덟 살인 1283년에는 이탈리아어와 투스카니어뿐만이 아니라 라틴어 또한 능통한 상태였다. 따라서 10대의 단테는 키케로와 보에티우스와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고전작가들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단테가 쓴 시와 산문에서 한 차원 높은 인문학적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단테의 이런 환경적 요인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이 신의 뜻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1290년 6월에 '단테의 뮤즈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났다. 단테는 깊은 슬픔에 빠졌고 베아트리체를 그리워하며 쓴 시들을 모아 [신생](새로운 인생, La vita nuova, c. 1293, The New Life)이라는 시집을 출간하였다.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과, 베아트리체의 죽음으로 인한 신학적적이고 철학적 질문과, 그것에 대한 인문학적 답변 찾기와 해석은 단테의 글쓰기를 이끈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베아트리체가 없었다면, 단테는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곡의 위대한 작가 단테’와는 완전히 다른 작가가 되었거나, 어쩌면 단테라는 작가 자체가 문학사에서 아예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베아트리체가 단테의 문학적 철학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베아트리체가 ‘작가 단테’를 탄생시켰듯이 단테는 베아트리체는 부활시켰다. 그녀와 그는, 서로 간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었던 셈이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작품 속에서 다시 태어나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단테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인문학적 지식을 신학적이고 철학적으로 승화시켜 [신곡](The Divine Comedy, c. 1308 - 1321)을 집필하였다. 단테는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숭고한 사랑의 존재, 신에 버금가는 고귀한 존재, 구원자로 재창조해 내었다. 단테가 재탄생시킨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이자 누구나에게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어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단테의 사랑을 통해 탈영토화 된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작품을 통해 재영토화된 것이다.  이로써 베아트리체는 더 이상의 탈영토화가 필요치 않은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 ***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만난 것은 ‘2번’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생 동안 겨우 2번’이라는 것이 주는 ‘극한의 아쉬움’을 ‘분명한 사실’이라고 믿고 싶아 하는 ‘독자로서의 갈망’이 만들어낸 허구의 숫자일 수 있다. 아무튼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2번이라는 횟수는 현실에서의 물리적인 만남에 국한된 얘기일 뿐이고 영적으로 단테는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또 만나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단테의 추방> Dante in Exile(c.1864), 

Frederic Leighton(1830–1896), 152.5 ×254cm(Private collection)     


베아트리체가 단테의 문학적 원천이었던 것처럼,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은 지금까지 무수한 문학작품들과 예술작품의 원천이 되고 있다. 19세기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빅토리아기의 화가(British Victorian painter)인 프레디릭 레이톤(Frederic Leighton, 1830–1896)이 그린 <단테의 추방>(Dante in Exile)에서도 그런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단테의 창백한 표정에서 그의 절망을 읽을 수 있다. 단테가 주인공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단테 본인은 화면의 중앙에서 우측으로 약간 밀려나 있다. 또한 빛은 단테가 아니라 화면 중앙의 좌측에 서있는 인물들에게 쏟아지고 있다. 단테를 밝히고 있는 빛은 직접적으로 그에게 조사되는 빛이 아니라 반사된 빛 또는 비스듬하게 조사되는 빛이다. 빛이 직접적으로 쏟아지는 곳 중앙에는 한 아름다운 여인이 단테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바로 베아트리체이다. 화려한 장신구와 옷으로 치장한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돌려 단테를 바라보고 있지만 단테는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추방으로 인한 고통보다 베아트리체가 있는 피렌체를 떠나야 하는 고통이 단테를 더 아프게 만드는 것 같다. 단테가 피렌체에서 추방형을 받은 것은 베아트리체가 세상을 떠난 훨씬 뒤의 일이기에 이 작품의 내용은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 베아트리체와 단테가 겨우 몇 달 차이의 동갑내기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베아트리체의 삶의 시간은 이십 대 초반에 멈춰져 있지만 단테의 삶의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문학과 예술은, 시간과 장소의 현실성과 구체성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단테 #피렌체 #베아트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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