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발치에서 가물대던 기차가 미끄러지는 듯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
피렌체에서 올랐던 기차와는 다른 외형으로 인해 라스페치아행 기차란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피렌체중앙역을 출발해서 피사중앙역까지 달려온 기차는 깔끔한 슈트 차림의 이탈리안사내와도 같아서 ‘잘 빠진 도시적 이미지’를 느끼게 했지만 지금 발판을 딛고 있는 이 기차에 엉켜 붙은 눅눅한 시간의 자국은 젊은 날의 완행열차를 떠오르게 한다.
여행길에서 마주하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언제가 맛깔스러운 추억이 될 수 있기에, 오히려 진한 친근함을 느끼게 만든다.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객차 안을 둘러본다.
다소 낡긴 했지만 잘 정돈된 실내공간에서 관리하는 이의 세심한 돌봄이 느껴진다.
“그래 낡음이란 게 아직은 늙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게야.”
좌석시트에 등을 밀어붙이고 창밖에 걸려 있는 세상을 바라본다.
아무런 책임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몹시 평화롭다.
이제부터 대략 한 시간은 내 것이 아닌 이 자리를 나의 자리라고 여겨야 한다.
작은 소동 같은 진동이 발끝을 타고 기어오른다.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속력을 더해 넣고 있다.
투명한 유리막에 조사되는 풍경이 점점 빠르게 지나쳐 간다.
조금 더 자주 나타나는 들판과 숲, 조금 더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과 마을에게 눈이며 가슴을 온통 빼앗긴다.
기차가 이동할수록 내려야 할 곳의 인력은 점점 더 강해지게 된다.
느낌 때문일 수 있지만 철길을 달리는 시간의 흐름은 일상에서의 시간보다 빠른 것 같다.
이윽고라고 해야 할지 벌써라고 해야 할지, 기차가 멈춰 선다.
다시 내려야 할 때다.
등가방을 챙기고 객차 바깥으로 나간다.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네모난 표지판에서 라스페치아중앙역(La Spezia Centrale)이란 글자를 발견한다.
친퀘테레 패스를 구입하고서는 친퀘테레행 기차를 기다린다.
친퀘테레의 다섯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기다리는 것 밖에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없다.
여행에서는 돌아다니는 것만큼이나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다.
운행시간표 칸칸마다에 박혀 있는 숫자들을 훑어본다.
다가올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떠나는 기차에게 손 흔드는 시간보다 느린 것이 틀림없다.
천체물리학에 따르면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고 한다.
"기다림의 중력은 떠나보냄의 중력보다 더 강한 것인가 보다.”
저만치에서 기차가 느리게 굴러온다.
뿌옇게 산란된 하늘빛 때문에 저기가 동쪽방향인지 서쪽방향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기관차가 끌고 온 객차 밖으로 몇몇 사람들이 내리고 다른 몇몇 사람들이 그 안으로 오른다.
누군가 떠나간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차오른 것 또한 세상의 법칙인가 보다.
끼익, 늘어진 한숨 소리를 나지막하게 내뱉으면서 친퀘테레행 기차가 움직인다.
지중해에 맞닿은 해안가 절벽 위에
색색의 조개딱지 같은 돌집들이
옹기종기 붙어지내는 다섯 마을
손을 뻗으면 금세라도 만져질 것 같지만
저마다 듬성듬성 자리 잡은
자그마한 다섯 마을을
사람들은 친퀘테레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