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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이 그리운 날, 박수근의 <굴비>를 보다가

밥상이 그리운 날, 박수근의 <굴비>를 보다가


박수근 화백의 그림 <굴비>를 보다가

가끔은 그림이란 게 바라보는 이에게 던져지는 주술과도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냥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이런저런 기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박수근 굴비.JPG <굴비>, 박수근, 1962년, 14.3cm x 28cm


박수근 화백의 그림 <굴비>(1962년, 14.3cm x 28cm)를 쳐다보다가 ‘그 참, 짭조름하니 맛있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아마 어린 날 장날 언젠가, 저 쿰쿰한 굴비 한 손이 찌그러진 밥상 위에 올라온 적이 있었을 것이다.

철없었기에 티도 없었던 그 시절, 고향집의 평상 마루에 퍼질러 앉아, 제 뺨만 한 커다란 숟가락으로 푹푹 큼지막하게 퍼먹던, 낱알갱이가 풀풀 날리던 보리밥 한 그릇이 너무 그리워진다.



밥상이 그리운 날

살다가 보면 유난히 배가 고픈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멀건 시래깃국 한 사발에 보리밥 한 그릇이 덩그러니 얹혀 있던 어린 시절의 밥상이 그리워지곤 한다.


장터 바닥에 늘어놓은 염장된 생선 눈깔 같이 희멀겋게 바랜 알루미늄 밥상은, 여기저기 쭈그러지고 까져서 성한 구석이라곤 어느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 그 밥상에 앉아 밥을 먹게 되었는지, 이제 와서 애써 기억을 더듬을 필요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 밥상은 뒷집 쭈그렁 할미 같은 모습으로 부엌 찬장 아래 어두컴컴한 바닥 구석에 늘 놓여있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방 안으로 들어올 때면 세월만큼이나 북북 긁히고 손잡이 끝 부분이 슬그머니 굽은 거친 숟가락 하나가 나뭇가지보다 더 빳빳한 젓가락 한 쌍과 함께 마치 풀을 이겨 붙여놓은 듯이 그 위에 놓여있었다.


종일 뛰어놀던 들판에서 누런 흙먼지 뒤집어쓴 채 끼니 찾아 집으로 기어든 까까머리 어린 사내놈은, 양지바른 뒷산 자락, 기억에도 없는 제 할아비의 봉분처럼 수북하게 담긴 보리밥을, 양재기에 담긴 멀건 시래깃국에 쓱쓱 말아 후루룩 쩝쩝 커다란 소리 호기롭게 내며 사내답게, 나름에는 멋있는 포즈로 뚝딱 해치우곤 했다.


동네에서 뛰어놀던 그 시절의 사내놈이라면,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사내답게 먹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섣부르게 알고는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반찬이란 건 딱히 기억을 더듬을 수 없다.

있다고 해본들 신김치 조각이나 짠지 몇 조각뿐이었을 테니, 이빨 빠진 사기그릇에 담긴 그것들은 어차피 어린 사내놈의 설핏한 눈길조차 받질 못했을 것이다.


애초 없던 뿌리란 걸 이제 와서 찾으려는 건 아니지만 기억의 한편으로 밀어 두었던 어린 날의 기억은, 분위기 괜히 눅눅해질 때면, 숨어 지내던 사내 어른 놈의 본능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아무리 퍼먹어도 배가 금방 꺼져버리던 그 시절의 보리밥 때문인 겐지, 나이 든 사내의 허기는 뱃속이 고픈 겐지 마음이 고픈 겐지 도무지 구분하기 어렵다.


누구에게나 부분 망각의 검은 휘장 뒤에 가려둔 한 때가 있기 마련이다.

푹푹 삭아 기억하지 말라는 것은 애써 찾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배고플 땐 적당히 배를 채우고, 여행이 고플 땐 배낭을 둘러메고 어디든 나서면 될 뿐이다.

그런 것들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저지를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럭저럭 잘 살아왔나 보다.

하지만 어찌 인간의 감정이 하나의 물길처럼 한줄기만으로 흐를 수 있겠는가.


어차피 채우지 못할 것을 알고는 있지만 가슴이 들어 올린 숟가락은 그 밥상의 밥그릇을 내려놓질 못하고 있다.

어쩌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이 허기가, 그 어린 사내놈의 사내다운 숟가락질을 그리게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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