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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기#1 - 기억의 서(序)

돌아보기#1 - 기억의 서(序)


아주 멀리 떨어져 버린 듯 아득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막상 헤아려보면 그리 오래 전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왜곡이 가해졌거나 채색이 덧입혔겠지만

믿고 싶은, 또는 믿어야만 하는,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에 와서 ‘그때의 그것’이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기억이라거나 추억이란 이름의 항아리에 담아 놓은

그때의 먼 흔적 저 편 언저리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다 보면

방향을 잃은 저녁빛이 산등성이를 진홍색으로 물들입니다.


언젠가 그곳에는, 들판 가장자리로 난 좁은 길을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길섶 옆을 따라온 개울물을 향해 내려서서

풀잎피리를 불며 풀잎 조각배를 띄워 보내던 그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길을 뒤돌아 나와 이리로 저리로 한참을 걸어가면

태초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만 같은 덩치 큰 초등학교가

마을을 내려다보는 키 큰 나무장승처럼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아이는, 바람이 흙먼지를 몰아가는 운동장의 끝자락에 서서

어지러움에 깜빡 정신을 놓을 만큼이나 높고 가물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내려 구름의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구불구불한 산자락을 바라보면서

누군가 보아뱀 무리를 풀어놓은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아이는, 끼익 끼익 음산한 신음소리를 뱉어내는 그네에 매달려 앉은 채로

돌아갈 발자국마저 지워가는 눅눅한 어둠을

아이의 셈법으로는 길고 긴 여러 날과 시간 동안을

불안과 평온이 오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 시간에도 행여 동네어귀를 어슬렁 돌아다닌다면

괜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될 것이고

저녁의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운동장은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기에 아이는,

그곳보다 더 좋은 곳일랑은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네가 일으킨 단말마의 경련 같은 검붉은 진동은

슬그머니 다가온 저녁의 바람에 엉켜 붙어

영겁의 시간 속에 똬리를 튼 메아리의 울음을 일으켰고

결코 멈출 것 같지 않은 그 떨림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아이는

삶이란,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기나긴 기다림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무수한 체념이 회귀하는 것임을

어렴풋하지만 너무 일찍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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