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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친퀘테레의 색

파랑, 친퀘테레의 색


큰 파도를 헤치고서 해안에 겨우 도달한 항해자가 다시 바다를 바라보게 되는 것처럼 아득한 바다와 까마득한 하늘에게 눈길을 빼앗긴다.


항해는 계속되어야 하지만 어쩌면 여기가 세상의 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바위에 걸터앉기로 한다.

누군가 바다와 하늘에 파랑을 짓이겨 뿌려놓았다.

노랑은 아니기에 <빈센트 반 고흐>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친퀘테레 색03.JPG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화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는 그의 저서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파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파란색은 다른 모든 색을 뛰어넘어 가장 빛나면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색이다. 파란색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가장 완벽한 색이기에 세상 어느 누구도 파랑을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첸니노 첸니니의 문장에서 파랑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친퀘테레의 절벽에 올라 하늘과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파랑은 가장 완벽한 색이기에 그 어느 색으로도 파랑을 대신할 수 없다.”며 파랑을 칭송하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날 것만 같다.

파랑_친퀘테레.JPG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모두 끄집어내어 친퀘테레의 색을 문자에 담아 넣더라도 왠지 “부족한 것 같다.”는 의구심을 거둘 수 없다.

더욱이 가장 독보적이면서도 가장 특색 있는 색인 파랑에 대한 것이기에 망망한 대해를 건너온 의구심의 바람이 가파른 해안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지중해의 빛이 발현시킨 친퀘테레의 색은 여태껏 머릿속에 담겨있던 ‘색’이라는 현상에게 커다란 진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정의(定義, Definition)라고 명명했던 사전적인 문장은 정당성을 잃어버린 채로 지중해의 하늘을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지중해 전체에게는 아니라고 해도, 이곳 친퀘테레의 파랑에게 더 아름답고 격에 맞는 표현을 찾아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제대로 된 옷을 지어 입혀야만 조금 더 당당하게 친퀘테레의 바다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행여 누군가가 ‘억지’일 뿐이라고 질책한다 해도 그리 상관할 바는 아니다.

지금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내가 저지르는 것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가슴과 머리의 결핍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해안절벽의 비탈길을 걸어 더 높이 오른다.

머리 위 허공에서는 눈부신 태양의 침묵이 이어지고 있고 지중해의 수면을 쓸고 지나온 바람은 물기 젖은 입술을 가만히 열고 있다.


절벽마루에서 바라보는 친퀘테레는 바다며 하늘이며 모든 것이 파랗다.

저 파랑에게 ‘무량의 크기를 가진 시리게 눈부신 파랑’이라는 이름 붙이고 가슴의 동굴에서 머물게 한다.

그래도 차마 머물지 않으려는 파랑은 눈의 잔상에 담아 넣고, 추억의 오두막 문손잡이 귀퉁이에 새겨 넣는다.

그런데도 발걸음 떼기 힘들다.

아직도 너무 많은 것이 남겨져 있나 보다. 미련하게도 영혼조차 저 파랑에 물들었나 보다.



<회화에 관한 논문>과 첸니노 첸니니에 대해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 c.1360 – before 1427)는 14세기말과 15세기 초, 이탈리아 르네상스 여명기에 활동한 화가이자 저술가이다.

투스카니 지방의 콜레 디 발 델사(Colle di Val d'Elsa, Tuscany)에서 태어났다.

피렌체로 옮겨간 첸니노는 아뇰로 가디(Agnolo Gaddi, c.1350–1396)의 공방에서 약 12년간 도제로 지냈다.

아뇰로 가디는 르네상스의 선구자이자 피렌체파의 창시자로서 화가이자 건축자인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 - 1337)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첸니노를 가장 유명하게 한 것은 <회화에 관한 논문>(Il libro dell’arte)을 집필한 것이다.

영어로는 <Treatise on Painting>로 소개되고 있는 첸니노의 이 저서의 이탈리아어 원제목은 <Il libro dell’arte>이다.

국내에서는 주로 <회화술의 서>로 소개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림 그리기에 관한 논문> 또는 <회화술에 관한 논문>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회화에 관한 논문>은 첸니노가 15세기초(1400년경)에 이탈리아의 파도바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양미술사에 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최고(最古)) 회화 기법서이다.

첸니노는 <회화에 관한 논문>에서 중세 후기와 초기 르네상스 회화에 있어 그 ‘방법’(how to)을 다루었으며, 그와 더불어 안료, 붓, 드로잉, 패널 페인팅, 프레스코화, 직물 페인팅 및 주조 등과 같은 다양한 회화적 기법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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