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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길, 똥개의 추억

도시 산책길, 똥개의 추억


손끝을 까딱이는 것 같은 아주 작은 일조차도 귀찮아질 때가 있다.

알고 있다.

내 몸의 가장 낮은 곳이 길바닥의 느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밑바닥의 요구란 건 대게 집요하기 짝이 없기에 애써 버텨본들 소용없는 노릇이다.

헤드폰을 머리에 두르고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는 집 앞 골목길에 나선다.

몸을 약간 건들거리며 걸어 다니다 보면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처럼 행여 멋있게 보이지 않을까, 실없는 상상에 입 꼬리가 올라간다.


도시는 소설이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낭만적이라거나 이국적인 아름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도시에서 살아보면 알게 된다.

소설은 그냥 소설일 뿐이고 영화는 단지 영화일 뿐이라는 것을. 있어야 할 만한 것은 모두 갖춘 것 같은데도 막상은 어느 것도 찾아지지 않는, 풍요와 결핍의 공간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이다.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고 있는 가게의 간판과 통행로를 막아 주차된 자동차 사이를 이리저리 걸음 돌려가며 걷는 것은 도시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익숙해진 행위이다.

도시에서 살아온 날이 얼마인데, 도시에서 먹은 짬밥이 얼마인데, 이런 것 따위가 감히 나의 산책길을 막아설 수 있을까.


도시를 산책하다 보면 분명 낯익은 풍경인데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어떤 것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어느 날엔 어린 계집아이의 아기자기한 장식장 같다가도 또 다른 날엔 무채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공사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이미 익숙해진 어느 하나에 대해서조차도 ‘이것은 분명 그것’이라는 절대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것이 이 도시의 풍경인 것 같다.


오늘의 산책길에서도 눈길을 빼앗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멀리에서 보니 얼핏 누르스름한 누더기 덩이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꼼지락꼼지락 움직임이 있는 것이 궁금증을 더욱 자아낸다.

어느 사이엔가 두어 걸음 바로 앞에 서있다.

줄 없는 낡은 끈을 목에 두른 개 한 마리가 고개를 쳐 박고 뭔가를 쩝쩝거리고 있다.

기척을 알아차린 것인지 나를 힐끗 쳐다보지만 이내 하던 짓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니 제 놈의 식사를 방해하려거나 어떤 해코지의 기색을 못 느꼈나 보다.


어릴 적 살았던 동네에는 개가 참 많았다.

이 집 저 집의 마당에는 덩치 큰 누렁이나 발바리라 불리던 키 작은놈 한두 마리가 묶여 컹컹 짖어대기 여사였고 마을 어귀에서 마을 뒷산까지 제 맘 가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해거름 할 무렵에야 집으로 기어들어 가는 팔자 늘어진 놈도 더러 있었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사람 아이 주렁주렁 달려있던 그 시절의 동네 공터에는 어린 사내아이들이 제 한껏 목소리 높여 뛰어놀다가 응가 소식이 아랫배를 콕콕 찌를 때면 공터의 구석 아무 데나 퍼질러 앉아 낑낑 용을 쓰곤 하였다.

동네 어른 누구랄 것 없이 제 새끼인양 엉덩이를 대충 닦아주고 나면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쩝쩝 꿀꺼덕, 두어 번의 큰 입질로 뒷정리를 해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아이들은 깔깔 웃음을 커다랗게 터트렸고 행여 여자아이들이 보게 될 때면 오만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럴 때면 그 개가 누구네 개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이 그냥 똥개라고 불렀다.


내 앞에서 뭔가를 쩝쩝대고 있는 저놈을 보고 있으니 그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똥개 놈이 생각난다.

똥, 참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입이나 글로 담아내기에는 좀 뭣한 단어이다.

방금까지는 분명 내 몸이 담고 있던 것인데도 배설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 똥의 운명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몸이나 가슴, 입 안에 잘 붙어 있다가 몸 밖으로 밀려 나오는 순간 더러워지는 것이 어디 똥, 그것 하나뿐인 것일까.


이젠 그 동네의 공터에서처럼 아이들의 똥을 먹어치우는 개는 찾아볼 수 없으니, 내 발 바로 앞에 있는 이놈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찌그러진 밥통에 든 사료에 꼬리 치며 침 흘리는 모습을 보자니 사료 개라고 불러야 할 것 같고, 이 사람 저 사람 적당한 이를 골라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헤픈 웃음을 컹컹 지어대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구걸 개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사료 개이건 구걸 개이건 상황에 맞춰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것이, 저놈 또한 도시를 살아가는 나름의 방법을 궁리해낸 것 같아 기특하기도 하다.

개의 꼬리란 게 본시 흔들라고 붙어있는 것이니 그것을 흔들어대는 대상이나 이유는 순전히 저놈, 자신의 처신에 달려있을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저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이들이 있다. 먹을 것만 챙겨주면 이유 불문 내 편이고 제 포대기에 주워 담을 것을 찾아 기웃기웃 어디든 가리지 않고 끼어드는 행실이란 게 흡사 목줄 풀린 떠돌이 개꼴이나 진배없다.


땟국 구질구질한 거리의 개 한 마리에게서도 아직 깨쳐지는 것이 있다니, 그 참, 무척이나 길었다고 여겨왔던 나의 배움이 아직은 짧은 가 보다.


저놈이 금방 해치운 먹을 것의 뒷맛을 못 잊겠나 보다.

혀를 길게 빼서 입가를 쓱쓱 훔치더니 꼬리를 흔들며 나의 뒤를 졸졸 따라온다.

대체 나 본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는 것인지, 생긴 것만큼이나 넉살 한 번 좋은 놈이다.

구멍가게에 들러 초코파이 낱개를 구입한다.

가게 문을 나서니 꼬리의 진동 반경이 눈에 띌 만큼 커진다.


그놈 참, 눈치까지도 빠르다.

포장지를 벗겨 놈의 주둥이 앞 길바닥에 내려놓는다.

텁텁 단 몇 번의 입질에 사라지는 흑갈색의 덩이가 동네 공터 구석에 싸질러 놓은 어린 사내놈의 그것 같다.

분명 아침에 큰일을 치렀는데도 아랫배가 아파온다.

골목길 모퉁이의 구석진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피식, 입 꼬리가 올라간다.

박수근 웅크린 개.JPG

박수근 <웅크린 개>(미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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