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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기간 동안 카라바조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밀라노에서 지낸 기간 동안 카라바조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밀라노 기간 동안 카라바조의 작품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카라바조는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을 떠난 그날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화가’였다.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은 더 이상 카라바조가 기댈 수 있는 온실이 아니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은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 한 가지뿐이었다.


화실을 떠난 것은 한낱 이름 없는 ‘보조 화가’로써 작품의 일부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다.

카라바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기에, 사실 자부심을 넘어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성공에 대한 열망이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뜨거웠다.


그런 카라바조가 도재 생활을 마친 후, 열일곱 살에서부터 스물한 살까지 약 4년이라는 혈기 끓어 넘쳤을 기간 동안,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이 이 기간 동안에 카라바조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는 원인이라는 주장은, 카라바조에 대해 너무 무지하거나 카라바조를 낮추어 보는 이들이 무책임하게 내뱉은 허무맹랑한 텍스트에 불과하다.


당시 카라바조가 처했을 여러 정황들을 고려해 보면, 도제 생활이 끝나고 독립적인 생활을 이어가던 1588년-1592년에도 카라바조는 어떤 형태로든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실을 떠난 카라바조가, 4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생활을 전전하던 시기에도 결코 붓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카라바조가 분명 이 4년 동안에도 그림을 그렸을 것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기간이 지난 후 로마에서 맞이했던 전성기 때만큼의 대작은 아니라고 해도 당시 이탈리아에 전역에서 유행했던 ‘캐비닛 그림’ 크기의 인물화나 정물화 정도는 분명 여러 점 그렸을 것이다.


/* 캐비닛 그림과 카라바조의 초창기 그림

캐비닛 그림(Cabinet Paint)이란 가로와 세로의 사이즈가 각각 약 60센티 정도인 그림으로 테두리가 있는 액자에 넣어 벽면 한쪽을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한 그림을 말한다. 캐비닛 그림의 주된 주제는 인물화나 정물화이다. 교회와 같이 규모가 웅장한 건물이나 대저택과 같이 아주 고급스러운 건물이 아닌 일반 가정주택이라 하더라도, 장식이 있는 액자에 넣어 벽면에 걸어두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소품 크기의 그림을 일컫는 용어이다.

실제로도 <과일 껍질을 깎는 소년>(Boy Peeling Fruit, c.1592–1593, 75.5×64.4cm, Fondazione Roberto Longhi/Longhi Collection, Florence), <병에 걸린 젊은 바쿠스>(Young Sick Bacchus, c.1593, 67×53cm, Galleria Borghese, Rome) 등과 같이 카라바조가 로마로 거처를 옮겨온 1592년 직후인 ‘카라바조의 초기 로마 시절’에 그린 작품들이 이 정도의 크기이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는 카라바조가 1588년에서부터 1592 사이에 그린 그림은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물론 카라바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작품이 발견되는 일이 근래에도 간혹 있어 왔기 때문에 훗날의 언젠가에는 이 시기의 작품 또한 발견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것과 관련되어 2016년 4월에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가 새로운 버전으로 발견되었다는 관련 기사를 통해 카라바조의 또 다른 작품이 발견될 것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겠다.


“프랑스 남부의 한 다락방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림 한 점이 발견되어 예술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작품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를 내용으로 한 것으로 진품으로 최종 판정될 경우 추정 가치는 약 1억 2000만 유 상당의 천문학적인 금액에 해당한다고 한다.


현지시간으로 2016년 4월 12일 영국의 가디언 등에 따르면 카라바조의 이 작품은 공동주택에 살고 있던 한 집주인이 지붕에서 물이 새는 것을 고치기 위해 다락방을 살펴보던 중에 우연하게 발견하였다고 한다.

유디트가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번에 발견된 카라바조의 이 작품은 사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카라바조의 작품이기도 하다.


그것은 카라바조가 1599년경(c.1598–1599(1602))에도 동일한 내용으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홀로페스트의 목을 치는 유디트>(Judith Beheading Holofernes, c.1598–1599(1602), 145cm×195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at Palazzo Barberini, Rome)는 현재 이탈리아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의 [갤러리아 나치오날레 다르테 안티카](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에서 소장하고 있다.


카라바조가 1600년 이후(1600년-1610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번에 발견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는, 작품이 그려지고 나서 약 100년이 지난 후에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150년이 넘도록 이 공동주택의 다락방 한 구석에서 사람의 손에 닿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렇듯 오랜 기간 동안의 방치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럽게도 작품의 상태는 대단히 양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술품 전문가인 에릭 투르킨(Eric Turquin)은 이 작품에 대해 "이번에 발견된 <홀로페스트의 목을 치는 유디트>에는 카라바조의 전형적인 빛과 에너지가 담겨 있으며 실수 없는 확고한 손길과 화풍으로 볼 때 카라바조의 진품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JPG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c.1598–1599(1602), 145cm×195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at Palazzo Barberini, Rome


카라바조가 이 시기(도제 생활을 마친 후 약 4년 간)에 그린 작품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주문했을 사람(고객)들의 성향과 배경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능해진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당시 십 대 후반 또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무명의 카라바조에게(당시 카라바조의 나이는 열일곱 살에서 스물한 살 사이였다.) 그림을 주문한 사람들은, 충분한 교양과 재력을 갖추고, 대저택을 소유하였으며, 예술에 대해 탁월한 조예가 있는 현직 고위 성직자나, 경제적으로 윤택한 주류의 귀족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무명의 카라바조에게 그림의 주문한 사람들은 약간의 경제적인 여유를 가진 일반 서민들이었거나, 비주류 계층의 귀족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의 내용이나 수준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그림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시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또한 단지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이 자신의 눈에 보기 좋았고 가격이 적당했으며, 테두리가 있는 장식 액자에 끼워 넣어 집안의 벽면 어딘가에 걸어 두면 왠지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겠다는 생각에 주머니를 열어 금전적인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애초부터 제대로 된 작품의 보관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라바조가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그림의 소유자가 이사를 해야 한다거나 크게 집을 수리해야 하는 것과 같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환경에 어떤 큰 변화가 발생하게 되면, 집안의 다른 잡동사니 물건들과 함께 헛간이나 창고로 옮겨졌다가 손상되어 결국에는 버려졌거나, 2016년에 발견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와 같이 잊혔거나, 화재와 같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소실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 카라바조의 그림을 구입한 사람들 중에는, 비록 경제적으로나 신분상으로는 당대의 주류 상류층은 아니었다 해도, 남다른 예술적 안목과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이들 또한 있었을 수는 있다.

그런 이들이라면 분명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의 진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았을 것이기에 앞서 기술한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카라바조의 그림을 감상하고 소장하며 관리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후 몇 년 후에는 카라바조의 화가로서의 명성이 이탈리아 전역에 자자해졌기 때문에 이 시기의 카라바조 작품을 구입했던 어떤 이들은 늦게라도 그 가치를 알아차렸을 것이고 그때부터라도 좀 더 소중하게 관리하였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카라바조가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이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카라바조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애석한 일이다.

언제가 이 시기의 작품이 발견된다면,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새로운 획을 긋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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