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밝힌 것과 같이 카라바조의 1588년부터 1592년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충분히 신뢰할 만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후 로마에서의 카라바조의 행적(카라바조는 1592년 중반에 자신의 태생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밀라노를 완전히 떠나 로마로 갔다.)과 로마시절 초기의 작품들, 그리고 각종 문헌자료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텍스트들을 기반으로 “1588년에서부터 1592년까지, 17살에서부터 21살까지, 4년이란 시간 동안 카라바조는, 틀림없이 이렇게 생활하면서 스스로에 의한 학습과 수련을 통해 예술사에 한 획을 그어 넣은 최고의 화가로 성숙해져 갔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 카라바조는 이 기간에, 화가로서 자신의 출신지인 밀라노와, 당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거점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유력 기성 화가들의 작품들과, 그 지역의 교회들과 기관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전 세대 화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을 세심하게 감상했을 것이다. 또한 그 작품들에게서 받은 예술적 영감은 카라바조가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해 나가는 데 있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 카라바조는 이 기간에, 자신의 생활 기반인 밀라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당시 롬바르디아 주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유행했던 자연주의 화풍과 사실주의 화풍을 좀 더 세심하게 탐구하면서 그것으로부터 필요한 부분들을 흡수하고 익혔을 것이다. 또한 그런 것들을 자양분 삼아 점차 자신의 화풍을 정립해 나갔을 것이다.
• 카라바조는 이 기간에, 1592년 중반 로마에 첫 발을 디딘 후 초기 몇 년 동안 그랬었던 것처럼,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몇몇 화실에 짧게나마 거처를 두고서 그 화실이 의뢰받은 작품의 제작에 간접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 카라바조는 이 기간에, 지역의 다른 기성화가가 의뢰받은 작품의 제작에 보조 화가로써 참여하면서 그 그림에서 할당받은 일정 부분을 그렸을 것이다.
이와 같이 카라바조는 이 기간에, 이탈리아 북부지역에서 당시 활동하고 있던 기성 화가들의 작품들과, 그 지역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이전 세대 화가들의 작품들을 살펴보고 익히면서 자신만의 회화적 기교와 기법을 창조해 나갔을 것이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또는 누군가의 주선을 통해 '주문 또는 의뢰받은 그림' 몇 점 정도는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카라바조가 이제 갓 도제 생활을 마친 십 대 후반 또는 갓 스물의 일개 무명 화가에 불과했다는 점과, 1500년대 말의 사회적인 여건을 바탕으로 추측해 본다면,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주문한 고객 또는 의뢰자라고 해봐야 기껏 '경제적인 면에서는 일반 평민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지만 신분상으로는 귀족 또는 성직자이거나, 신분상으로는 일반인인데도 살아가는 것에 있어 일반 평민들보다는 경제적인 여유를 가진 상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 정도였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당시 고객들이 카라바조에게 주문한 그림이라는 게 ‘그리 질 좋지 않은 액자에 끼워 넣어서’ 그들이 살고 있는 주택의 거실 벽면이나 침실 벽면 따위에 걸어두면 그런대로 보기에는 괜찮을 것 같은, 그래서 약간의 품위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고 또한 약간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하지만 화가의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민망해질 것 같은 그저 그런 별 볼일 없는 ‘표구하기에 괜찮은 그림’ 정도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이 당시 카라바조의 그림을 구입한 행위에 대해 ‘작품을 의뢰한 것’이라는 예술적인 표현을 붙이기보다는, 마치 시장에 늘려있는 물건 하나를 집어 구입하듯이 ‘주문한 것’ 또는 ‘구입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리고 그들을 ‘작품 의뢰자’가 아닌 ‘주문자’ 또는 ‘고객’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시 카라바조에게 있었던 상황을 좀 더 제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그런 류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야심 가득한 젊은 화가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은 한낱 풋내기 무명화가에 불과했던 카라바조로서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생계를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 법칙이다.
카라바조가 할 줄 알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붓을 손에 잡고 물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없었기에, 마치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듯이, 이 시기에도 몇몇 보잘것없는 그림들을 그려서 몇 푼 되지 않는 금전과 교환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카라바조의 경제적인 상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88년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을 떠난 직후에는 그의 주머니에 어머니가 남겨준 유산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아직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화실을 떠난 초기 1-2년 정도는 경제적으로 큰 문제없이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거점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유명한 기성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고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적으로 점차 궁핍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사회경험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신이 가진 것에 관리상의 문제가 있었고, 거기에 카라바조의 무절제한 생활이 겹쳐지면서 밀라노를 떠난 1592년에는 카라바조의 주머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았다.
부모를 모두 잃고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고 익히면서 4년여를 지내다가, 열일곱 살에 세상으로 나왔으니, 당시의 카라바조에게 경제적 관념을 기대하는 것은 쓸데없는 무의미한 짓일 뿐이다.
따라서 카라바조가 1588년에서 1592년 사이에도 몇몇 작은 사이즈(캐비닛 사이즈)의 작품을 그렸었다고 한다면 그 시기는, 1588년에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을 떠난 바로 직후가 아니라 1591년이나 1592년, 나이로는 20살에서 21살 경에 그랬을 것이며, 시기로는 카라바조가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입성하기 1-2년 전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카라바조가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도착한 1592년 직후부터 남겨 놓은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되면, 그림에 있어서의 카라바조의 기교와 실력은 이 시기에 이미, 한낱 풋내기 무명 화가가 가질만한 정도가 아니라, 그의 스승인 시모네 페테르자노뿐만이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 북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견 지역 화가들의 경지를 훨씬 넘어섰기에, 비록 아직 무명 화가에 불과했지만 분명 카라바조에게 작품을 주문하는 고객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그중에는 예술적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카라바조의 작품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제대로 보관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시기에 그려졌을, 또는 그려진 카라바조의 작품은 아직까지 한 점도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이 그 시기의 카라바조에게, 사생활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서의 도제 생활을 마친 1588년 직후에 카라바조에게는, 1584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준 유산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한동안은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다.
• 1592년 중반에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옮겨간 후, 로마에서의 초기 생활이 빈궁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보면, 밀라노를 떠나기 전 몇 년 동안 카라바조의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이 이어졌던 것 같고, 이로 인해 어머니가 물려준 유산 대부분을 탕진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 카라바조의 성향을 통해 추측해 보면 이 시기에 이미 폭력을 동반한 어떤 분쟁이나 사건에도 휘말렸을 것이다. 실제로 카라바조가 폭행사건을 저질러서 로마로 도피했다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