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말부터 로마는 분명 부활하고 있었다.
기원전(753 B.C.)부터 시작되었던 고대 로마(Ancient Rome)의 시간은 5세기말( 476 A.D.)에 이르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지만, 시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그러하듯이 그 나름의 방식대로 흘러갔고, ‘로마령(領)’과 ‘로마라는 도시’로 이어져진 온 몇 가닥 로마의 역사는, 16세기말에 이르러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예술적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카라바조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화가로 활동한 것은 로마가 부활하고 있던 바로 이 시기였다. 어쩌면 로마는 카라바조를 기다려 부활의 기지개를 켠 것일 수 있다.
/* 고대 로마(Ancient Rome)의 시간에 대해
현대의 역사학(historiography)에서 고대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의 도시로서 로마가 건국된 때부터 서기 5세기 서방 로마 제국(Western Roman Empire)이 붕괴할 때까지의 로마 문명(Roman civilisation)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크게 [로마 왕정 시대](the Roman Kingdom, 기원전 753년–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 시대](the Roman Republic, 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 그리고 [로마 제정 시대](the Roman Empire, 기원전 27년–서기 476년)로 나뉜다. */
당시의 로마는 예술가들에게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 기회를 쫓아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하는 로마’를 향해 몰려들었고, 그들에게 로마는 실력만 있다면 타고난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가 성공을 꿈꿀 수 있는 새로운 세상, ‘신세계’와도 같았다.
하지만 기회라는 것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막상 그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그리 공정하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쩌면 당시의 그들은 미처 몰랐을 수도 있다.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그것마저도 아예 찾아볼 수 없었기에, 로마를 향해 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로 몰려드는 그들을 떠올려 보면 마치 어둠 속에서 하나의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들에게 로마는 반짝이는 불빛으로 보였겠지만 자칫 부나방을 태워 죽일 수도 있는 뜨거운 모닥불과도 같은 도시였지 않을까.
로마는 점차 이주민들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어 갔다.
당시 로마의 전체 인구가 약 10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그중에 원래의 주민이 얼마였는지, 이주민들이 얼마였는지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당시의 로마를 ‘이주민들의 도시’라고도 표현하는 문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주민이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로마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사람들 간의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고 치열해진 경쟁은 사람들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사소한 것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부상을 동반하는 거친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건장한 사내들이었기에 말끝마다 ‘기사도 정신’을 들먹이며 잘난 척을 했겠지만, 막상 그들이 내세우는 기사도 정신이란 것은 한낱 질 낮고 거친 사내들의 허황된 꿈을 주관적으로 포장한 것일 뿐이었다.
1605년에 전(前) 편이, 그로부터 십 년 후인 1615년에 후(後) 편이 발표된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 스페인의 소설가, 군인, 시인, 극작가, 세금 징수원)의 소설 <돈키호테>를 떠올린다면 카라바조가 살아가던 16세기말과 17세기 초가 어떠했을지는, 비록 카라바조가 살았던 나라(이탈리아)와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나라(스페인)는 다르지만, 돈키호테가 살았던 시간과 카라바조가 살았던 시간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시대적 환경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카라바조가 연루된 거친 다툼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있었던 불화들은 당시의 사회 환경과 카라바조의 성향이 맞아떨어지면서 발현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손바닥 두 개가 서로 마주쳐야만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카라바조가 크고 작은 여러 사건들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그 사건들에 연루된 상대방의 성향 또한 카라바조와 크게 다를 바 없었고, 시대적인 환경 역시 그것에 일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에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소의 더함이나 덜함이 있었겠지만, 카라바조의 거친 성향은 당시 로마의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살아가던 사내들이 가졌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성향일 수 있다.
저잣거리는 낮과 밤이 다른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도시의 모습이다. 낮 시간에는,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던 대중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지만 밤이 되면 성인 사내들에게는 그들만의 놀이터가 되는 곳이다.
부활하는 로마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그들이 모여 살아가는 거리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란이 끊이질 않았다.
로마뿐만이 아니라 밀라노와 베네치아 같은 대도시들의 상황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의 대도시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자들은 강해야만 했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든 강해져야만 했다. 강해질 수 없다면 강한 척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간 남자들에게 있어 강하다는 것은 곧 거칠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로마의 저잣거리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일반적인 남자들은 거칠 수밖에 없었고 거칠어야만 했다.
카라바조는 그런 거친 시대를 살아갔고 그래서 더욱 거칠어져야만 했을 것이다.
어떤 거침은 죄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카라바조는 그 정도가 지나칠 만큼 거칠었다.
그래서 카라바조는 사법적으로 죄인이 되었다.
카라바조가 당시를 살아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거친 것은, 시대적 환경이나 성향뿐만이 아니라, 성장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흑사병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십 대 초반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기에 카라바조는 그 거친 시대를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남아야만 했다.
거칠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어린 카라바조는 몸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행동을 불가해(不可解)하게 보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망막에 맺힌 하나의 상(像) 일뿐이다.
우리의 시선에는 카라바조의 행동이 명백하게 거칠고 폭력적이며 불가해하고 불규칙적이라고 하더라도, 카라바조를 예외적이라고 할 만큼이나 기이한 인간으로 표현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일 수 있다.
카라바조에게 있어 거침이란 살아남기 위한 그만의 방식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뿌연 유리 너머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카라바조라는 17세기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을 수 있다.
카라바조를 좀 더 선명한 모습으로 보고 싶다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유리의 표면을 먼저 깨끗하게 닦아내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그 유리의 표면에, 겁에 질린 두 눈을 껌뻑이면서 두서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어린 날의 카라바조와, 성공을 향해 발버둥 치고 있는 젊은 날의 카라바조, 그리고 서른이 넘어서도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칠지만 안쓰러운 카라바조가, 낡은 영화의 늘어진 한 장면 같이 맺히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