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드 플로르는 인간이 차지하는 '인간의 공간'이 아니라 사유가 인간의 몸을 빌려 점유하는 '사유의 공간’이다.”
파리 6구의 생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 지역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 172 Boulevard Saint-Germain, Paris 6e)는 카페 되 마고와 카페 뒤 돔과 함께 20세기 프랑스 문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의 카페이다.
파리의 보헤미안 문화가 활기를 띠었던 19세기말(1887년 경)에 문을 연 카페 드 플로르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카페 되 마고(Café des Deux Magots)와 함께 파리 지식인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카페의 이름인 플로르(Flore)는 카페의 맞은편에 있는 Saint-Germain-des-Prés 성당의 조각상인 La Flore(꽃의 여신)에서 따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flore는 로마 신화의 꽃과 봄의 여신 플로라(Flora)에서 유래한 ‘꽃’을 뜻하는 프랑스어 명사로서 생성과 활기, 갱신, 젊음, 변화를 상징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카페 드 플로르의 이름에는 ‘낡은 정신이 죽고 새로운 사유가 발아하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카페 드 플로르라는 이름에서는 ‘1720년에 문을 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이며 유럽의 살롱 문화와 계몽주의, 예술사와 혁명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Venizia)의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카페 플로리언(Caffè Florian)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베네치아에 카페 플로리언이 있는 것처럼 파리에는 카페 드 플로르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도 20세기의 카페 드 플로르는 작가와 문학가뿐만이 아니라 철학자와 화가들이 어울려 떠들고 토론하고 교류하면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 지식인들의 살롱이었다.
20세기가 초반을 지나 중반에 들어선 시기인 1930-1950년대에 카페 드 플로르는 ‘좌안(Left Bank) 실존주의 지식인들’의 본거지로 자리 잡았다.
그 당시 카페 드 플로르를 찾았던 지식인들 중에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30-1950년대)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30-1970년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40년대), 보리스 비앙(Boris Vian, 1940년대) 그리고 예술가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910-1930년대),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1910-1930년대)와 같이 문학과 예술에서 혁신적인 영역을 창조한 지성들이 있다.
카페 드 플로르는 단순히 오래되고 유명한 ‘카페라는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20세기 유럽 정신사에서 ‘근대적 사유의 방식’을 이끈 ‘지성들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카페 드 플로르’의 테이블을 차지하려는 것은 커피를 마시며 카페의 장식을 감상하거나, 카페에 얽혀 있는 역사적인 사건과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타인과 어우러진 공공의 장소(카페)에서 자신의 실존을 탐구한 지성들의 사유의 방식’을 더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라는 ‘인간’은 비록 고독한 삶을 살아가고는 있지만 고립되어 살아가기를 바라지는 않으며, 자신의 사적인 사유를 공공의 장소에서 표출하면서 타인과 어울리기를 바라는 존재이다.
이런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인간의 양면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카페인 것이다.
20세기 초중반의 카페 드 플로르: 뒤편으로 카페 되 마고의 어닝을 볼 수 있다.
카페 드 플로르가 갖는 의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실존주의’의 탄생 와 관련된 것이다.
특히 장 폴 샤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카페 드 플로르는 ‘존재가 일상이 된 공공의 공간’이었다.
그들에게 카페 드 플로르는 집은 아니었지만 집이었고 대학의 연구실도 아니었지만 대학의 연구실이기도 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카페 드 플로르의 2층을 자신의 집이자 서재로 삼았고 장 폴 샤르트르는 아침이면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글을 썼다.
그들은 카페 드 플로르에서 원고를 쓰고 논쟁하고 연인(장 폴 샤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연인 사이였다.)을 만나고 정치와 전쟁, 여성문제와 자유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들에게 카페 드 플로르는 사유가 일상과 함께 하는 ‘사유의 일상 공간’이자 ‘일상의 사유 공간’이었으며 이를 통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철학적인 의미의 존재로 재영토화를 이루게 되는 형이상학의 공간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같은 테이블’에 나란히 또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앉아 글을 썼다.
여기에서 말하는 ‘같은 테이블’은 연인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20세기의 사유 방식 자체가 바뀌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연인 사이였지만 그들이 앉는 방식은 보통의 연인들처럼 ‘마주 앉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물론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잡담을 나눌 때도 있었지만 글을 쓸 때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았다.
이로써 그들 두 지성은 ‘너를 바라보는 나’이자 ‘나를 바라보는 너’로서가 아니라 ‘너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나’이자 ‘나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너’가 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위계를 가진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동일한 선상에 있는 동시적 주체’로 대하는 것이 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서로를 연인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공동의 사유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카페’를 선택한 것일까.
그것은 집은 너무 사적인 공간이고, 대학은 너무 제도적인 공간이며, 정치는 너무 폭력적인 장치이기 때문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46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찍은 사진에서 2차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지성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카페는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사유’로 변환시키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대개의 경우 집이라는 공간에서는 밀폐된 관계 안에서 사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것과는 달리 카페는 여러 가지의 소음이 있고, 내가 아닌 타인이 있고, 우연한 시선과 예기치 않은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 허용되는 '사유가 현실과 순환하는 공간'이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하는 사적인 감정에는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포함된다.
그래서 그들이 카페라는 공개된 공간의 같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는다는 것은 그들의 만남이 사랑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따른 숨기고 싶은 비윤리적인 연애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추상 안에 숨지 않는 '전시된 사유의 실험'이라는 암시적인 선언이었다.
장 폴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이라고 하였지만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를 잡아 끄는 ‘지옥’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루라로 인해 장 폴 샤르트르는 “어떤 타인은 지옥이지만 어떤 타인은 거울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 철학의 최초의 독자이자 최초의 비평가였으며 최초의 반대론자였다.
그들은 카페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글을 씀으로써 일상의 연예를 한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공동으로 써 내려가는 지적이고 철학적인 동거를 선택하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글처럼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살펴본 것과 같이 카페 드 플로르는 실존주의의 요람이자 20세기 초중반 문학과 철학의 아이콘이었다.
카페 드 플로르는 인간의 자유, 선택, 책임을 주제로 한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공간이었으며 시인, 소설가들이 사유와 작품을 교류하던 창의적 지성의 허브였다.
문학잡지 Les Temps Modernes(현대)의 창간(1945) 논의가 여기에서 이루어졌으며 1994년에는 Café de Flore의 이름을 딴 플로르 문학상(Prix de Flore)이 이곳에서 창설되었다.
플로르 문학상은 ‘자유롭고 현대적인 문학정신’을 가진 젊은 작가에게 수여되는 문학상으로 수상자에게는 소정의 상금 외에도, 수상자 이름이 카페의 유리잔에 새겨지고 1년간 무료로 와인을 마실 수 있게 하고 있다.
카페 드 플로르의 전통은 전쟁의 파괴 속에서도 이어져 왔다.
2차 세계대전 시기 파리는 나체에게 점령당하였지만 카페 드 플로르는 그렇지 않았다.
나치에 점령당한 파리는 말과 행동의 침묵을 강요하였지만 사유의 침묵까지는 강요하지 못했다.
침묵과 나치의 검열 속에서 카페 드 플로르는 ‘사유의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카페 드 플로르에서는 인간의 사유가 전쟁의 파괴를 이겨내었다.
비록 총이 지배하는 시대였지만 인간의 사유는 카페 드 플로르의 테이블 위에 자유롭게 남겨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