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고도를 기다리며>와 <시지프스의 신화>, 부조리

7. 부조리극의 정수 <고도를 기다리며>와 <시지프스의 신화>


열여덟의 그 시절에 탐독했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프랑스어:En attendant Godot, 영어:Waiting for Godot)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 The Myth of Sisyphus)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기다려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인간에게 내려진 천형과도 같이 표현한 부조리 문학의 정수로 다가왔다.

때마침 극단 산울림(대표 임영웅 연출가)의 창단과 함께 <고도를 기다리며>가 무대에 올랐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실망을 느끼다가 자리에서 뛰쳐나오기도 했다.(<고도를 기다리며>가 1969년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있었던 초연에 이어 다시 무대에 오른 것은 1985년, 마포구 서교동(지금의 주소는 와우산로 157)에 있는 '소극장 산울림'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시지프스의 신화>는 방문이 닫히는 여음과 함께 나무 계단을 내려서는 또각거림처럼 영혼의 정적을 깨뜨리는 '정신의 도끼'가 되어 문학과 예술이 뿜어내는 미세한 소리와 움직임에 더욱 빠져들게 만들었다.



부조리와 허무주의,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

극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어느 한적한 시골길에서 고도(Godot)라는 이름(명칭?)으로 불리는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것 같긴 하지만, 정체를 특정할 수 없는' 인물(?)을 기다리는 뜨내기들이다.

블라디미르(Vladimir)는 약간은 지적이고 사유하는 인물이다.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기억과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알베르 카뮈의 관점에서 본다면 블라디미르는 '부조리를 인식하고 반항하려는 의지'를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반항은 '소극적 반항'이기에 '소극적 순종'으로 읽힐 뿐이다. 블라디미르는 '소극적 반항'과 '소극적 순종'이 같은 궤일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이가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이가 된다."는 아이러니 또한 부조리일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에스트라공(Estragon)은 지극히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인물이다. 매일 밤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장화가 발에 맞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며, 배고픔을 호소한다. "아무것도 할 게 없어."라는 말을 내뱉으며 허무주의에 빠지곤 하지만 결코 블라디미르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에스트라공는 허무주의가 종속주의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 또한 부조리일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의 상징, 포조(Pozzo)와 럭키(Lucky)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지루함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포조와 럭키는 인간관계에 있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이한 한 쌍이다. 여기에서 포조는 목에 줄을 매어 럭키를 부리는 지배자(주인)로 거만하고 권위적이지만 2막에서는 눈이 멀어버린 채 등장하여 인간 권력의 덧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럭키는 포조의 짐꾼이자 피지배자(노예)로 평소에는 침묵하지만, 포조의 명령에 따라 '생각'을 시작하면(굴종하는 인간상을 상징) 멈추지 않고 궤변을 쏟아낸다(도구화된 지성을 상징).


<고도를 기다리며> 시지프스의 또 다른 얼굴들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은 카뮈가 말한 시지프스의 또 다른 얼굴들이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굴리듯 디디(블라디미르)와 고고(에스트라공)는 매일 같은 장소에서 오지 않는, 또는 올 것 같은 고도를 기다린다. 어제와 오늘이 구분되지 않는 시간의 굴레 속에서 그들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결국 "내일은 꼭 고도가 올 거야."라는 희망(혹은 착각)을 다시 품고 자리를 지키기를 반복한다. 시지프스가 빠진 무의미한 반복의 행위와 디디와 고고의 행위가 다르지 않기에 그들은 시지프스의 또 다른 얼굴들인 것이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의미라고 한다면 그들의 기다림을 두고 의미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관객은 부조리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걸음을 막아설 수 없게 된다.

"고도는 누구일까.", 고도가 누구인지, 신(God)인지 혹은 죽음인지 작가 사무엘 베케트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중요한 것들은 고도가 올지 안 올지가 아니라,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고고와 디디가 나누는 실없는 농담과 사소한 다툼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디디와 고고가 맺은 관계는 '절망 속의 연대'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그들이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서로의 존재이고, 서로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에스트라공이 떠나려 할 때마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붙잡는 것은, 부조리한 운명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가 '함께 바위 밀기'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디디와 고고는 시지프스의 또 다른 얼굴들이지만 그들이 맺은 연대는 그들을 조금은 덜 외로워진 시지프스, 조금은 덜 힘겨운 시지프스가 되어 어떻게든 세상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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