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리는 열여덟의 자화상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는 열여덟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치 아무런 책임 없다는 듯 연못 개구리에게 그냥 던진 돌 하나와도 같은.
그것은 산등성이에서 바라보는 검은 밤의 우주보다 더 찬란하고 기묘한 것이어서 영겁의 세월을 더 한다고 해도 결코 알지 못할 것만 같은 난제 중에 난제였다.
하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내려진 천형이란 걸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또는 어쩔 수 없이,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오를 수 있었다.
카프카가 말한 '도끼 같은 책'은, 적어도 그때는, 바로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만약에 말이야, 인생이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의미 잃은 날들의 연속일 뿐이라면, 인간은 도대체 왜 살아야만 하는 거지?"
'죽음'을 개입시켜 이 물음을 해석하고들 있지만, 이 물음은 '삶과 죽음이라는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한 것을 너머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관한 것이란 걸 간과해서는 안된다.
카뮈는 이 '절망적인 물음'에 대해 '부조리'라는 진단을 내리고, 역설적으로 '행복한 시지프스'라는 처방전을 내놓았다.
1. 부조리: 의미를 찾는 인간의 갈망과 끝내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어긋남, 침묵하는 세계와 갈망하는 인간의 간극
신화 속 시지프스는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형벌을 받은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도 그 형벌은 계속되고 있기에 형벌은 결국 현재의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어떤 것들은 과거의 것이 바로 현재의 것이며 현재의 삶은 과거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된다.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순간 바위는 여지없이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그 바위를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그 행위는 암묵적 강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복적인 행동이지만 이미 '무의식의 의식화'를 이룬 것이기에 '잠재적 본능'이 되어 있다.
반복되는 것에서 오는 학습효과는 그것을, 부조리한 것이라고 해도, 이성적인 것이라고 의식화를 이루게 된다.
<시지프스의 산화>에서 카뮈는 이와 같은 '무의미한 반복' 또는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워 보이는 반복'이 곧 인간 삶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견디고, 내일에는 또 다른 해가 떠오를 것이라는 기대로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위해 지식을 얻으려고 하고 자신의 스펙을 쌓아 올린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만 죽음이라는 파괴적이고 절대적인 중력 앞에서 인간이 이룬 모든 성취는 한순간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죽음은 단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도 있다.
정신적 죽음은 인간을 '살아있지만 죽은 자'로 만드는 강력한 중력이며 인간은 이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길,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지만 그 중력은 인간을 쉽게 놓아주질 않는다.
의미를 찾는 인간의 갈망과 끝내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어긋남, 침묵하는 세계와 갈망하는 인간의 간극, 그것이 바로 카뮈가 말한 '부조리(Absurde, Absurdity (철학적, 문학적 부조리))'의 실체인 것이다.
2. 의식의 깨어남: 바위를 향해 내려가는 시간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카뮈가 가장 주목한 것은 시지프스가 돌을 다시 밀어 올리기 위해 산을 걸어 내려가는 '의식의 시간'이다.
카뮈는 돌을 굴려 정산을 향해 올라가는 시간이 아니라 구르는 돌을 따라 내려가는 시간을 가장 극적인 시간으로 보고 있다.
다시 밀어 올려도 결국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것이 운명이기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걸음을 옮겨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그 '의식의 시간'이 시지프스를 자신이 처한 비극보다 더 위대한 불명의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위의 고통'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의 시간이 있기에, 행위의 주체가 형벌을 내린 신이 아니라, 형벌을 받고 있는 시지프스임을 공표할 수 있는 것이다.
3. 반항과 자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위엄
카뮈는 이와 같은 부조리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도피(죽음, 자살)이나 종교적 희망(신화적 비약)과 같은 현실에서의 회피 대신(일종의 소극적 반항)에 '반항(Révolte)'이라는 적극적 행위(정신적, 물리적)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반항이란 내 삶에 주어진 형벌과 한계를 똑똑히 응시하면서, 시지프스가 돌을 따라 걸어 내려가는 의식의 시간에 그런 것처럼,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뜨거운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산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라는 카뮈의 문장은, 돌을 굴려 산 정상에 올렸다는 '결과'가 숭고한 것이 아니라, 다시 굴려 올리기 위해 돌을 따라 내려가는 '과정'이 숭고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선언문이다.
바위는 다시 떨어졌지만, 그것을 밀어 올려야 한다는 매 순간의 의식의 시간은 살아남은 자의 전유물이다.
강하기에 돌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돌을 굴리기에 강한 것임을, 살아남았기에 강한 자라는 것을 시지프스는 알고 있다.
인간은 지금 돌을 굴리고 있기에, 돌을 굴리는 한 계속해서 살아있을 수 있기에 강하고 행복한 존재인 것이다.
오늘날의 시지프스들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인간들보다 더 않은 것들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카뮈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가장 찬란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라는 중력이 바위를 자꾸만 아래로 끌어당겨도, 나무 계단을 내려가는 '또각거림'처럼 선명한 자기만의 리듬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카뮈가 우리에게 상상해 보라고 권유했던 '행복한 시지프스'의 모습일 수 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곧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환상 없이 의식의 시간을 마주하려는 용기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