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상황은 카타르시스를 동반한다고 한다. 카프카 그리고 전혜린, 그들의 비극 또는 비극적 작품은 본질 그 자체를 넘어 또 다른 무언가가 된 것 같다. 알려진 또는 그렇게 보려는 이들이 각색한 그러한 현상은, 이미 변형된 본질로서 실존이란 둥지를 차지한 것일 수도 있다. 믿어야만 존재함을 알게 된다는 간단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적 문제를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비극이 세세한 요소별 진위여부를 떠나 분명 '그러했다'는 큰 틀 안에 뿌리를 깊이 내린 것은, 카타르시스를 향한 인간의 본능이 만든 비극적 증후군일 수도 있다.
카프카의 작품 '변신'에서 주인공인 그레고르의 변신을 그 자신에 의한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본다면 전혜린, 그녀가 택한 세상으로부터의 출구란 게 자의적이었는지 타의적이었는지, 어쩌면 타의에 의해 꾸며진 자의적 선택이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것에 대해 자의적 변신과 타의적 변태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녀의 출구를 타의적 환경에서의, 그것만이 그녀를 기다린 마지막 출구였을 수도 있었기에, 자의적 변신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이미, 분명 외면하려 했겠지만, 언젠가부턴, 자신이 올라탄 열차가 비극이란 종착지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속도가 더해진 그 열차에 몸을 맡긴 채 자신에게만 주어진 좌석에 앉아, 아니 번호가 새겨진 그 좌석에 갇혀, 창 밖의 먼 풍경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보단, 비록 그 종착역이란 곳이 조금 앞으로 당겨진다고 해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 좌석을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찾아내는 지름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비극의 예감은,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만져지지는 않지만 늘 그 자리에 있음을 인지하게 되는 것 같다. 무뎌진 손끝의 감각은 그것의 정체를 애써 외면할 뿐이라서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난 그것을 마주칠 때면, 세상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미 때란 것이 늦어졌기 마련이다. 무언가에 대한 때 늦은 알아차림은 대개의 경우 인간의 체념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 그를 본질로 보기엔 이미 카프카적 현상이 너무 커져 버린 것 같다. 변형과 왜곡을 거쳐 수많은 현상을 낳은 것이 <카프카적 현상>이니, 어쩌면 카프카는 그라는 개체의 외면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상(象) 자체로 <메타 현상(Meta Phenomenon)>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카프카라는 개체에 대해 ‘그 무엇을 넘어선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 <메타 본질(本質)>을 찾아야 하는데, 카프카적 시야로 본다면 ‘진실을 인지하려는 것 자체가 무위’ 일 수가 있기에, 현상에만 머물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서 짧은 지식은 위안을 찾는다.
전혜린의 경우도 카프카와 비슷한 선상에서 그녀를 바라보아도 좋겠다. 짧은 그녀의 삶이 남긴 흔적이란 게 그녀가 번역한 몇 편의 작품과 직접 쓴 얼마간의 수필일 뿐이다. 결국 글이라는 그녀의 외면적 표출을 통해 그녀의 내면을 짐작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작가라는 관점에서의 그녀는 비록 문학적 완성도에 대한 논란이나, 문학사에 남긴 족적이 미미하다는 비평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전혜린’이란 이름만으로도 이미 지울 수 없는 하나의 메타 현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평가의 잣대를 들이대기 위한 충분한 표본의 확보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전혜린에 대한 작가로서의 평가에서는, 평가를 위한 충분한 규모의 작품을 확보할 수 없으니, 본질보단 현상으로, 평가보단 서술로서 그녀에 대해 얘기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쨌든 그녀의 본질에 대한 논의란 게, 어떤 관점에서 잣대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시대적 현상이 그녀와 만나 만들어 낸 문화적 애증 관계를 크게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카프카와 전혜린, 그와 그녀를 이야기하다가 보면 전혜린의 글에 나타난 ‘낮의 숨 막힘과 밤의 여유로움’에서 두 사람의 공통된 시간을 찾게 된다. 샐러리맨으로 숨 막히는 일상의 낮을 보낸 카프카는, 이른 저녁잠을 청한 후 깨어난 이른 새벽 또는 깊은 밤, 어둠의 여유로움 속에서 글을 쓰곤 하였다. 전혜린의 글 또한 밤의 여유로움이 여기저기 진하게 묻혀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낮과 밤, 밝음과 어둠, 생활과 자아라는 상반된 환경 속에서 삶은, 비극의 속성을 잉태하게 되는 것일까. 환경이 이중적이라서 비극이 잉태되는 것인지 비극이 잉태되었기에 환경이 이중적이 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검은 밤의 시간을 다소 비현실적인 시간이라고 본다면, 기괴하기까지 한 주인공의 상황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그리고 차가운 문체로 기술한 카프카의 작품에 대해, 좀 더 이해 섞인 해석의 단초를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창 밖을 보니 어느새 새벽이다. 책상머리에 앉았다가 서재의 긴 소파에 드러눕기를 주기 없이 몇 차례 반복하고 있다. 부스스한 밤의 몰골로 카프카와 전혜린, 그와 그녀를 엮어보려고 해보지만 쓰다 말다 한 글의 윤곽이 채 선명해지기도 전에 멀리 동쪽 하늘의 아랫자락에서 첫 빛이 고개를 내민다.
뮌헨의 슈바빙 거리에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돈이 떨어졌다. 배는 다소 고프지만 나는 즐겁다. 오늘은 가을 하늘이 멋이 있었고’라고 중얼거렸던 젊은 날의 그녀 전혜린, 새털처럼 가벼웠을 그날의 그녀와, 검은 슈트에 검은 모자를 씌고 검회색 돌바닥을 걸어 그의 직장인 보험 심사원으로 출근하던 카프카가, 문득 멈춰 서서 올려다보던 프라하의 파란 하늘을, 마음껏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 날이다.
// 몇 해전 누군가에 의해 카프카의 전집이 완간되었다고 한다. 이제 와서 굳이 구입하지는 않겠지만 소식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십 여권의 카프카의 작품들.. 젊었던 시절의 그때엔, 참 구하기 어려웠었는데 이젠 전집까지 발간되었다니..
쉽게 구하게 된 것이 긍정으로 작용하지만은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얕은 바다에 겨우 인 잔물결이 되지 않기를, 진정 그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마음으로 바란다.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Dongguk Uinversi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