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逆說)이라 번역되는 패러독스(paradox)란 모순을 야기치 말아야 하는 원래 그런 것, 그러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자의적이거나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서, 그래서는 안 되는 특정한 상황에 빠져들거나 그러한 결과에 도달하게 되어 논리적으로 어떠한 모순을 일으키게 되는 논증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야로 보자면 이러한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이란 게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역설적 상황이란 것을 정과 부라는 이분법적 개념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패러독스적이라는 표현에는, 논리적으로는 분명 어떠한 모순을 일으키고는 있지만 그 모순 속에는 어떤 진리나 의미가 찾아지는 현상 또는 상황이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카프카의 작품 또한 이러한 패러독스적 시야로 바라볼 수 있다. 카프카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주인공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정황을 살펴보면, 작가적 상상력이 덧입혀진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해 작가 자신의 경험과 사고를 이입시킨 또 다른 인물 또는 개체를 전면에 내세우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고 그러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상황에 빠져들거나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카프카적인 문체로 기술하면서 텍스트에 내포된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게 하고 있으니, 그의 작품 세계는 분명 패러독스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그저 난해하다거나 이해하기 힘들다는 다소 모호한 표현의 범주에 묶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들이 현실의 세계에 있어 어떤 재현 가능성이 없다는 점과, 독자의 현재 시점을 기반으로 논리적 서술이 어렵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에 과다 노출된 눈과 마음, 과학과 이성으로 길들여진 머리로는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이러한 패러독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기 마련이다.
벌레, 개, 쥐와 같이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비현실적 주인공들은 카프카 그이거나 우리 인간의 대역일 것이다. 그렇다면 카프카에게 인간이란, 그 자신이란 어떠한 존재이었을까.
그가 말한 것처럼 ‘존재한다는 것은 그곳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속한다는 것’이라 한다면, 그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삶에서 마주치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분명 이러해야 함에도 그러할 수 없는 패러독스 한 현상을 미리 예견한 것일 수도 있다.
펜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넓은 창 쪽으로 책상 두 개를 길게 놓은 서재에는 두 벽면을 둘러싼 책장과 거기에 빼곡하게 꽂힌 오래된 책들 그리고 책갈피 어디엔 가에 접혀 있을 몇 개 색 바랜 추억들과, 다른 한쪽 벽면에 길게 등 붙여 누운 황갈색 가죽소파와 서재 중간쯤 자리 잡은 네모난 탁자, 창 앞자리에 앉은 한 남자의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짐짓 어색해진다. 이 서재가 내가 속한 곳이라면 난 이곳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니 나의 존재 영역이란 건 너무도 좁기 그지없다.
불현듯 벽면 모서리 구석에 자리 잡은 두 짝 미닫이 문이 이물스럽다. 오돌토돌한 무언가를 이겨 바른 황갈색 벽면에 진한 오크 톤 가구를 채운 이 서재에 하얀색 커다란 문이라니, 파리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저 어색함을 왜 지금에 와서야 인지하게 된 것일까. 그 참, 틈 많은 저 문 하나가 나의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라면 나의 존재는 그저 하연 종이 한 장으로 가린 연약할 막일뿐일까.
어떠한 것이,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과, 스스로를 존재케 하는 것에는 커다란 틈새가 있어 보인다. 분명 그러하지 말아야 함을 알고 있지만 이러함을 그냥 받아들일 뿐이니 카프카, 그의 존재가 패러독스 하였듯이 나의 존재 또한 패러독스 할 뿐이다.
발끝으로 바닥을 밀어 바퀴 달린 의자를 창 가까이로 끌어간다. 창밖으로 내리는 오후의 햇살 줄기가 유리 막 너머로 넘어선다. 존재와 비존재의 투명한 막을 조심스레 연다.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Dongguk Universi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