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uFrau's Frau-03
현대 여성의 삶과 자유에 대한 성찰을 목적으로 역사 속 인물을 조명해 보는 'FrauFrau's Frau'의 이번 주인공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국내 미술계의 거목이자 수필가로도 활동하신 천경자 화백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천경자 화백의 이야기가 미술계는 물론 매스컴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는데요.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천 화백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위작 논란이 처음 붉어집니다. 하지만 미술관과 검찰 측에서는 여러 감정을 통해 진품이 맞다며 강하게 맞섰고 이 시비가 천 화백의 사망을 전후로 여러 국면을 맞이하며 현재까지도 매듭이 안 지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위작시비 초기, 국립현대미술관의 강한 반발과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천경자 화백은 큰 충격과 상심을 느낍니다. 이에 절필을 선언하고 둘째 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위작시비로 꾸준히 고통을 받다가 2015년 8월 9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천경자 화백은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재학 중 미술교사로부터 그림을 배우고, 1940년 17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듬해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데생이나 채색법에 대해 배웠고, 이즈음 본명이던 옥자(玉子)를 버리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입니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재학 시절 천경자는 야수파나 입체파를 가르치던 서양화 계열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 고등과로 가서 모델을 관찰하며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배웁니다. 이후 1942년과 1943년에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와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각각 입선하며 공식적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습니다.
이후 귀국하여 모교인 전남여고를 비롯해 조선대학교, 홍익대학교에서 교사, 강사, 교수 등으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며, 1955년 출판한 수필집 '여인소묘'를 시작으로 평생 10권이 넘는 저서를 발표하며 수필가로서도 큰 인기를 얻습니다. 실제로 전숙희, 박경리, 한말숙 등 여성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일생 동안 두 번의 결혼, 네 명의 자녀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6·25전쟁, 베트남전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소 경험하며 숱한 이별과 사랑, 예술적 영감을 채워갑니다. 여인의 한(恨)을 동양적인 화풍과 특유의 대담하고 밝은 색채로 표현해 생전부터 미술계는 물론 대중에게도 많은 사랑과 명성을 얻습니다. 꽃과 여성을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자주 등장시켰고 자화상을 자주 그린 화가이며 인간의 감정과 일상, 삶과 현실을 본인만의 색채로 솔직 대담하게 표현해냈습니다. 특히 천 화백만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교하고 섬세한 붓질은 실로 빈틈이 없고 환상적인 채색과 화풍을 형성합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라면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실제로 꼭 관람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천경자 화백은 당대에 흔하지 않은 개방적인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스케치 기행을 목적으로 세계 일주를 다닌 것은 물론 상당한 애연가이기도 했고, 화가, 문인, 배우 등 많은 예술가들과 왕래했다고 합니다. 일생의 희로애락과 도전정신, 그리고 자신만의 노력과 재능으로 국내 여성 화가로서 입지전적인 커리어를 개척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프라우프라우에게는 그녀의 삶 자체가 여성의 자유이며, 예술가 이전에 스스로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낼 줄 아는 용기와 지혜만으로 천경자 화백에 대한 존경을 고취시키게 됩니다.
2006년 그녀는 회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예쁜 그림으로 인기에 영합하지도 않았다.
항상 미래지향적 소재와 화풍을 찾아세계를 방랑하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위작시비가 발생했던 초기, 분노와 상심을 담아 이렇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다시 봐도 '국내 여성 화가 천경자'가 아닌 '화백 천경자'의 지조와 자부심만이 느껴지는 바입니다.
배경 Image YTN
내용 Image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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