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 지금 계절은 여름이다. 매미는 울지 않는다. 산이 없기 때문일까? 그토록 지겨워하던 쓰라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세련되어져 버리고 말았다. 우유에 아메리카노 믹스를 타 마시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천원으로도(운이 좋다면 그보다 적은 돈으로도) 갓 내린 커피를 찰랑거리게 마실 수 있다.
추억하며 괴로워하지 않겠다. 괴롭다는 것조차 모른다. 이것은 독백이자 비밀스러운 고백이다. 사람은 모두 비겁하니까. 살아가기 위해서 잊어버릴 것이 많다.
우연히 꿈을 꾸었다. 너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고 말했다. 기뻤다. 수면이 진동하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퍼졌다. 아, 깨어 버렸다. 불면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곳은 너무 추웠고 너와 나는 너무 미지근했기 때문이겠지.
가족들은 네가 색연필 대신에 펜을 잡기를 바랐다. 가끔 펜으로도 그림을 그렸으니 그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닐 것이다. 빈 독서실에서 너는 꾸짖음을 듣고 있었다. 언니의 옆얼굴은 날이 선 듯 시퍼렜다. 한 번쯤 큰 소리로 울어 주길 바랐을 것이다. 우는 것은 곧 책임을 뜻했다. 모두 교활한 아이들이었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리라 다짐했었다. 열일곱의 보지 못한 단풍보다 아름다운 어른이 되겠다고.감히 묻고 싶다. 왜? 정말 죽고 싶은 건 나였는데. 너는 삶에 재능이 많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자기주장이 넘치고, 입이 거칠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간혹 어설픈 동정으로 널 원망하지 않을게. 네가 행복하길 바랄게 하고 중얼거려 보지만 위선이다. 네가 죽었기 때문에, 나는 살아남았다. 불행한 삶을 끈덕지게 영위하고 있다.
J, 너는 나에게 책임이 있다. 나는 겁먹은 어른이다. 돌아갈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 삶을 이루기에는 너무 아프다. 답은 뻔하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날이 흐리다. 비바람이 불 것이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어느 흐린 여름날.
너의 친구였던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