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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엉 Apr 12. 2020

아플 때 싸구려 음식이 당기는 이유

 까무룩이 황야를 헤매면 먹고 싶은 것들이 있다. 주황빛 새우깡이나 드르륵거리는 황도캔, 우유에 만 건빵 같은 것. 종이봉투 안에 들어 있는 건빵이라면 더욱 좋다. 시장의 호떡도 좋겠다. 대신 장이 끝날 즈음이라 식어서 딱딱해진 것이어야 한다. 백화점 마감 세일에서도 밀려난, 보기에만 좋은 도시락 따위. 눅눅해진 새우튀김을 양념 없이 베어 물고 차가운 기름을 혀로 슬슬 굴려 녹인다. 오후 네 시 무렵의 어중간한 시간에 초등학교 앞 분식집의 떡볶이 같은. 막 새로 만들 즈음이었다며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에 자리한 불어 터진 밀가루 떡, 어묵, 쫄면 덩어리가 무자비하게 뒤섞인. 어쩌다 보니 저녁을 거르고 밤을 낮 삼아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가족들이 시켜 먹고 남은 치킨의 고소한 냄새. 랩에 싸인 날개 두 조각. 예정된 노동 후 먹는 새벽의 맥도날드. 거리에는 아직 불조차 켜지지 않아 고요한데, 나의 손에 뚝뚝 떨어지는 케첩 덩어리. 장마가 끝날 무렵 오기로 덜덜 떨면서 뭍으로 올라와 먹는 컵라면. 공포와 청춘이 뒤섞인 기름진 국물.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는 진짜 바나나 우유 대신 노란 식용 색소가 들어간. 게는 영점 일 퍼센트도 들어가지 않은 킹크랩 맛살. 런천미트가 들어간 김치찌개.


 배는 부른데 마음이 고팠던, 나를 먹여살린 싸구려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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