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때까지 하는 영어 회화 도전기 (4)
피츠버그 공항에 도착해서는 미리 예약해둔 택시를 타고 모건타운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굽이굽이 산길이었는데 눈이 덮여 있어서 경관이 참 아름다웠다. 택시 기사님은 60대 정도 돼 보이는 백인 노신사로 가는 내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주었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말이 빠르지 않아 이해하기가 수월했고, 내 영어가 부족함에도 답답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먼 한국에서 온 나한테 이렇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나눠주는 게 고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1시간 반 동안 원어민 영어회화를 무료로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만 꾸준히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영어 실력이 많이 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건 타운에 도착해서는 택시기사님의 소개로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게 되었다. 차가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저렴한 숙소는 그곳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숙소는 로비가 따로 없이 2층으로 된 가로로 긴 건물이었는데, 외부에서 열쇠를 열면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방 안에는 침대와 TV, 작은 테이블만 달랑 있었다. 한국의 저렴한 모텔방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천정 등이 어두운 주황색 불이 어두워서 책을 읽기 힘든 것이 다소 불편했지만 걸어서 병원과 맥도널드를 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가격이 주변 호텔의 반값 밖에 안되어 여기서 쭉 지내기로 하였다.
실습 첫날은 교학팀을 먼저 찾아갔다. 건물 안을 헤매던 도중 지나가던 사람에게 길을 묻자 쭉 따라가서 무슨 표지판이 나오면 왼쪽으로 꺾으라고 했는데 어디서 꺾으라는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번 더 이야기를 해줬음에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일단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길을 따라 가보았다. 방마다 있는 표지판을 훑어보면서 걸어가던 도중 Anatomy라고 쓰여있는 방을 발견하였다. 그제야 아까 길을 안내해준 사람이 이 표지판을 말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해부학이라는 이 단어를 '아', '나', '토', '미'라고 강세가 없이 말을 하지만 원어민의 발음은 '어내-너미'라고 발음과 강세가 모두 생소했다. 한국식으로 익혔던 의학용어의 발음들이 도리어 원어민의 발음을 인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나를 담당하는 교수님은 40세 전후로 보이는 비교적 젊은 백인 남성이었다. 좀 통통하고 키가 나보다 작았는데 상당히 친근한 인상이었다. 교수님을 처음 봤을 때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부터 고민이 되었다. Professor라고 하면 너무 길어서 부를 때마다 불편할 것 같았고, Mister는 좀 반말 같기도 하고, Sir는 군인처럼 좀 딱딱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부르는지 보고 따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교수님은 자신을 Tony(이하 토니)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메일을 주고받을 때 본 원래의 이름과는 다른 애칭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는 교수님이 하늘같이 높은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에 존칭 없이 이름을 부르라고 한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한국인인 나에게 상대방의 이름을 직함 없이 부르는 것은 친구나 아랫사람, 또는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한국에서는 상대방을 존중할수록 좀 더 높은 지위를 표현하는 말을 호칭으로 써야 한다. 심지어 나는 인턴 시절 학과장을 맡고 있는 교수님을 과장님이 아닌 교수님이라고 불렀다가 레지던트 선생님한테 혼이 난 기억이 있다.
교수님은 본인 소개를 간단히 한 후 병원에 나를 데려가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미국 실습 학생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교수님의 회진 팀은 총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수님을 제외한 3년 차 인도 출신 남자 레지던트 선생님 한 명과 2년 차 파키스탄 출신 여자 레지던트 선생님, 그리고 실습 학생은 필리핀에서 이민을 온 남학생이었다. 교수님을 제외한 구성원이 모두 외국인인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환자분들이 외국인 의사들을 신뢰하고 치료를 맡길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실제로 팀원들은 모두 교수님을 토니라고 격의 없이 부르고 있었고 심지어 회진을 돌 때면 간호사분들조차 'Hey, Tony'라고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는 그러한 모습이 적응이 안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어느덧 자연스럽게 교수님을 토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호칭이 직함이 아닌 이름으로 바뀌자 교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긴장되지 않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호칭, 존칭법 등 언어적인 상하관계의 틀이 실제 관계에서의 경직성을 강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이 팀의 구성은 또다시 나한테 언어적인 어려움을 안겨 주었다. 토니는 말이 또박또박하고 속도가 빠르지 않은데 반해 레지던트 2년 차와 3년 차 선생님은 말이 엄청 빠르면서도 발음과 억양 모두가 미국식과 달라 알아듣기 힘들었다. 미국 영어 발음으로 또박또박 이야기해주어도 이해를 할까 말까 하는데, 인도, 파키스탄 억양이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2년 차 선생님은 심지어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말을 할 때마다 소음같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나를 제외한 다른 구성원들은 모두 원활히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상한 발음과 억양으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데 나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영절하에서는 원어민과 똑같은 발음으로 성대모사까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저 둘은 원어민과는 전혀 발음이 다른데도 유창하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발음과 듣기 능력, 말하기의 유창성은 아마 별개의 영역일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