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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란 Dec 06. 2021

서양의 고도(古都)로 향하는 그 첫 발걸음

Rome (18.01.26 ~ 18.01.29)

  끝나지 않을 것처럼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던 이 여행도 어느덧 중반부에 접어든 탓일까? 지금껏 누적된 피로에다가 바포레토에서 묻어온 겨울바다의 한기까지 잔뜩 머금은 상태로 잠들었음에도 두 눈은 다소 이른 시간에 떠졌고, 그대로 일어나 열린 창문을 통해 번져오는 베네치아의 새벽 감성을 한껏 들이켜고 있었다. 지난밤 늦은 시간까지 빈 오페라하우스에서 챙겨 온 엽서에 생각나는 소중한 이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손편지를 끄적거렸다. 그러니 피곤함이 눈꺼풀을 짓누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누워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콧속까지 진하게 배어버린 이곳의 물 내음처럼 베네치아와의 이별은 그 아쉬움의 농도가 상당했다.


  떠나는 오늘을 위해 아껴 둔 바포레토 1회권을 써서 산타루치아 역으로 가는 베네치아의 마지막 뱃길을 눈에 담았다. 수로에 비친 고풍스러운 유럽풍 건물들의 잔상과 이를 가르며 나아가는 곤돌라 노꾼들의 끝없는 항해들로 덧칠된. 뒤이어 올라탄 이탈리아 곳곳을 이어주는 고속열차는 야간열차가 나를 실어왔던 반대방향으로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깊은 여운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게 한없이 흐르고 흘러 로마에 닿을 때까지.




  나라는 인간은 알면 알수록 참 간사한 것 같다. 이미 지나간 상황들이 너무 아쉬워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도 막상 새로운 걸 마주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금세 호기심을 반짝거리며 태세 전환을 한다. 아니 어쩌면 이 오래된 도시가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걸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다 현재를 온전히 즐겨야 하기에 이런 경우에 한해 잠시 망각의 열매를 삼키곤 하는 것일까? 연유가 어쨌건 간에 테르미니 역에 도착해 맞닥뜨린 로마의 첫인상은 알 수 없는 기괴함과 신비스러움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오래된 도시라는 인상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었지만 일단 정체를 알 수 없는 쾌쾌한 냄새가 역 주위에 가득했다. 다수의 건물들이 여유 없는 간격으로 늘어서 형성된 좁은 골목들의 그림자 곳곳까지 쉬이 환기가 되지 않는 탓도 있어 보였다. 이런 잿빛 거리에서 유채색을 좇아 하늘로 시야를 옮겨보았지만 정체모를 까만 새 때 수천 마리가 뒤덮고 있었다.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일단 안전이 확보된 공간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테르미니 역 일대는 소매치기가 많아서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곳이기에 왼손은 캐리어를, 오른손은 외투 속 스마트폰을 단단히 붙잡고 주위 사람들과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호텔까지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잔뜩 긴장하며 걸어왔던 골목길을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묵었던 숙소 중 가장 작은 방이지만 저렴하면서도 깔끔하고 아늑했다. 다만 구식 엘리베이터가 동작할 때마다 상당히 불안했는데 그 마저도 없는 건물이 허다하다는 말을 접한 후로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리고 용도를 당최 모르겠는,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의문의 시설 때문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세면대와 비슷하게 수도꼭지와 물 빠짐 구멍까지 달려있었으나 그 높이가 변기보다도 낮았다. 발을 씻는 족욕대? 그도 아니면 유아용 욕조나 소변기?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보았지만 결국 인터넷 검색 찬스로 알아낸 정답은 수세식 비데였다. 그 위에 걸터앉아 물을 흘려 깨끗이 씻어내는 방식인데 익숙하지 않아서 사용할 때마다 민망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안도감과 동시에 허기짐도 몰려올 시간이었다. 이탈리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피자와 파스타인데 피자는 이미 베네치아에서 맛보았으니 이번엔 파스타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다수의 블로그에서 그 맛이 인증된 한 식당에 들어서자 유쾌한 주인아저씨가 한국말로 인사하며 빈자리로 안내했다. 아직도 혼밥이 어색해서 쭈뼛거리며 식당을 둘러보니 다른 한국인들도 보였고 작은 병에 와인을 주문해 홀로 식사를 즐기는 현지인도 있었다. 한술 더 떠서 주인아저씨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손님들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잔뜩 굳어진 몸이 서서히 풀려갈 즈음 나온 해산물 파스타와 병맥주는 긴장의 연속이었던 로마를 다시금 여행지로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위험한 밤길은 절대 나서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아직 다 가시지 않은 흥겨움이 오랜 갈망과 어우러져 나를 호텔 밖으로 끌어냈다. 사방이 어두운 골목이기에 그나마 밝은 조명이나 가로등이 보이면 뛰어가서 주변 안전을 확보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두려움을 안고서까지 이 밤길을 달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고대 로마의 불가사의인 '콜로세움'을 너무도 보고 싶었기에. 외벽 절반이 무너졌음에도 그 웅장함에 압도되는 이 거대 원형경기장은 은은하게 설치된 조명을 더욱 환하게 반사하며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 둘레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고대 로마의 찬란했던 과거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황홀했던 밤의 산책이 만들어낸 감정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 콜로세움을 다시 찾아왔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수많은 검투사와 맹수들의 피로 물들인 무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관객석과 그 많은 자리를 채웠던 관중들이 순식간에 퇴장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거대한 아치형 통로들을 발로 디디고 손으로 쓸어보며 흥분이 최고조에 다다르던 순간이었다. 문득 콜로세움의 외벽이 뚫린 곳을 통해 보이는 저 언덕 너머에 있을 가톨릭의 총본산, 바티칸에서 보낸 어제의 하루가 떠오르며 시간은 나를 그때 그 공간으로 데려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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