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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란 Jan 12. 2022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Rome (18.01.26 ~ 18.01.29)

  쿠폴라를 내려온 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광장에서 이어지는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을 따라 바티칸을 빠져나왔다. 그 길 끝에는 여러 천사들이 자태를 뽐내는 산탄젤로(Sant'Angelo) 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지만 오전 내내 이어진 투어로 이미 점심때를 훌쩍 넘긴 내 눈은 밥 먹을 장소만을 훑는 중이었다. 그렇게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에 닿아 주저앉을 때까지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가이드 님이 추천한 피자집은 대기줄이 너무 길었고 그 외에 가볼 만한 식당들은 죄다 브레이크 타임이었던 것이다. 바티칸 투어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일정도 계획하지 않은 탓에 랜덤박스처럼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명소들을 모두 돌아볼 기력이 내게는 없었다.


  첫날부터 느꼈던 로마의 스산한 기운이 좁고 오래된 골목들마다 들어차 갑갑한 데다가 작은 것도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은 매 걸음마다 피로를 누적해갔다. 마치 한정된 용량의 컴퓨터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운 데이터를 처리하다가 과부하가 걸린 느낌. 그 버거움을 재부팅시킬 종료 버튼을 만나게 된 것 또한 여느 로마의 장소들처럼 지극한 우연이었다.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공간, 만신전(萬神殿)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판테온(Pantheon)은 이름 그대로 로마와 그 휘하로 복속된 이방인들의 모든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이후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들이 그랬듯 개종되어 성당으로 변모했고 그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날 반겨주었다.


  외벽 곳곳이 시간이란 칼날에 벗겨져 그 속살을 드러낸 것만 봐도 어마어마한 연식을 짐작할 수 있는 건물. 그럼에도 그 내부는 깔끔하게 유지되어 있었고 둥근 벽을 따라 온갖 신들을 모셔 놓았을 공간들이 지금은 가톨릭의 여러 상징들과 라파엘로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무덤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천장 돔 한가운데에 뻥 뚫린 거대한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태양빛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경건함을 불러일으켰다. 무엇이 날 피로와 배고픔도 잊고 여기 서있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오랜 옛날부터 판테온을 찾아 저 구멍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던 많은 이들과 교감할 수도 있으리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굶주림을 달래고자 결국 내가 꺼내 든 카드는 맥도널드였다. 다소 조촐하긴 하지만 이보다 나은 선택도 몇 없으니까. 오히려 로마에서 먹으니 유럽의 여느 빵집들처럼 그 풍미가 남다른 느낌이었다. (실제로는 한국과 다를 것 없는 재료들이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나와 환상적인 스프레이 아트를 그리는 드로잉쇼를 감상하다 보니 어느덧 로마의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도시를 밝히는 조명들을 자신의 흰 대리석 표면으로 반사하며 한층 더 빛나는 야경을 만들어내는 트래비 분수(Fontana di Trevi)를 지나 도착한 스페인 광장.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스페인 계단에 앉아 유럽 감성에 흠뻑 취해 있었고 나 역시 그 일부가 되었다.




  이미 찰나의 기억으로만 남아버린 바티칸의 하루를 몰아내고 현실을 들이마신다. 고대 로마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일곱 개의 언덕, 그중 로마의 시작이라 여겨지는 팔라티노(Palatino)에 올라 조금 전까지 머물었던 콜로세움부터 포로 로마노(Foro Romano)에 이르는 고대 도시의 흔적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미 온전한 건물을 찾기 힘들 정도로 폐허가 되었기에 포럼(Forum)의 어원이 된 이름의 뜻처럼 과거 저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던 상상을 해보는 것으로 이 알 수 없는 적막함을 채워 나가야 했다. 피가 멈춘 시체처럼 더 이상 사람이 돌지 않는 죽은 도시. 기나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는 대도시의 광영도 그저 한순간 타오르는 덧없을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언덕을 넘어 내려와 거대한 공터만 남은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수많은 전차들이 경주에서 이기려 내달렸을 경기장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그 유명한 진실의 입과 마주하게 된다. 거짓을 말하면 입 안에 넣은 손이 댕강 잘린다는 무시무시한 전설이 서린 원판의 정체가 본래 맨홀 뚜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시원한 공간을 찾아 오른 또 하나의 언덕, 아벤티노(Aventino)에 위치한 오렌지 정원은 테베레(Tevere) 강의 맞바람을 맞으며 바티칸의 전경을 바라보기에 아주 일품인 장소였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좀 전까지도 오늘 늦잠을 잔 것부터 시작해서 이틀 전 테르미니 역에 내리자마자 구매한 48시간짜리 로마패스를 제대로 쓰지 못한 걸 죽도록 후회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잘츠부르크 이후로 처음 본 맑은 하늘 아래에서도 내 기분은 짙은 구름이 가득했다.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라 이틀을 온전히 투자한들 모든 명소를 다 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지나온 여행 내내 이미 뼈저리게 겪은 아쉬움들로는 아직 그 배움이 부족했나 보다.


  쉼 없던 여정의 끝에 오른 마지막 언덕, 그와 이름이 같은 카피톨리노(Capitolino) 박물관에 들렀다. 의도적으로 원근감을 왜곡해 오르는 길이 가팔라 보이지 않도록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는 계단에 속아 철근 무게의 백지장을 옮긴 기분이었다.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늑대의 젖을 빠는 유명한 청동상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곳의 가치는 따로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박물관 내부를 걷던 내 눈에 들어온 커다란 유리창, 그 너머로 보이는 포로 로마노의 고풍스러운 야경 속에 낮에 봤던 황량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잔잔하지만 찬란했다. 죽어 있던 옛 도시에 심장의 붉은빛을 공급하는 모양새를 하고.


《4박 5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 로마 여행 발자취》


1일 차 (18.01.25) - 유럽 7일 차
잘츠부르크 중앙역 |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 > 카발레토(Cavalletto) 호텔 > 부라노 섬 > 산 마르코 광장 > 리알토 다리

2일 차 (18.01.26) - 유럽 8일 차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 | 로마 테르미니 역 > 세레나(Serena) 호텔 > 콜로세움

3일 차 (18.01.27) - 유럽 9일 차
바티칸 미술관 > 성 베드로 대성당 > 산탄젤로 성 > 나보나 광장 > 판테온 > 트레비 분수 > 스페인 광장

4일 차 (18.01.28) - 유럽 10일 차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 > 콜로세움 > 포로 로마노 > 팔라티노 언덕 > 진실의 입 > 오렌지 정원 > 카라칼라 욕장 >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 카피톨리노 박물관

5일 차 (18.01.29) - 유럽 11일 차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공항(FCO) | 파리 오를리 공항(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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