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턴 투 서울'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릴 때 타국으로 입양 되어 살아 온 개인사를 지닌 주인공으로부터 관객은, 그녀가 세상을 이해하기 전부터 품기 시작했을 어떤 갈증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영화는 이렇듯 그녀가 ‘거의’ 선천적으로 품고 있을 갈증에 따른 선택을 구심점 삼아 전개된다.
이러한 제재는 영화가 부지런히 입증해야 할 가치의 종류를 예상 가능한 범위로 만든다. 가령 이방인이라는 존재의 자아라든지, 가족의 의미, 행복 찾기 같은 것. 어떤 개념이든 생각해 볼 만한 거리가 충분하지만, 나는 특히 이 영화가 남기는 하나의 질문 앞에 멈춰섰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삶의 본질적 공허는 어떻게 채울 수 있는가?” 주인공 프레디는 이 질문을 이끌어가는 역할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주로 프레디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두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관객은 스크린에 가득한 그녀의 얼굴, 눈동자의 깊이를 따라간다. 의미는, 오해를 낳는 언어보다 아마 더 정확할 미묘한 안색과 표정의 변화로 전달된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가 직면한 상황을 힌트 삼아 그녀의 얼굴을 통해 인물을 이해하길 원하는 것 같다. 마치 이 이야기는 제 3자의 서술이 아닌, 오롯이 그녀의 1인칭 시점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보여주길 원한다는 듯이.
그녀는 간단히 말해 현실에 순응하기보단 저항하는 편이며 자기 세계가 확고한 인물이다. 처음 한국에 와서 악보를 처음 보고 음악을 연주해내는 ‘시주’의 개념과 두려움에 관해 얘기하며 낯설 법도 한국의 술자리 문화에 특유의 재치와 자신감으로 단번에 적응하는 그녀, 프랑스에 있는 부모와 연락하며 서툰 감정을 내비치려다 마음을 다잡는 그녀, 생부와 만나 불편하고 어색한 마음의 거리를 줄타기하는 그녀,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직시하고 끝내 어머니를 찾는 그녀,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는 그녀의 모습까지.
그녀는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한다. 그러나 원하는 것은 그녀에게로 오지 않는다. 그토록 당당하고 솔직한 인물이어서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갈의 끝에 가 닿지도 못한다는 현실의 대비가 크게 느껴진다.
위의 말을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영화(세상)는 인물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공간도 내어주고 은혜로운 기적도 베푼다.(아마 프레디가 아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프레디는 시도하고자 했던 모든 걸 하게 되고 '원래는 불가능하지만' 어떤 우연과 기적 같은 순간으로 어머니와의 만남이 성사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도록. 그러나 영화는 결국 프레디가 원했을 완전한, 혹은 안전하게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을 끝내는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가 이제 ‘행복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잔인한 방법으로, 영화는 그녀가 답이 없는 곳에 남겨지도록 ‘만들었다.’
왜? 공허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간절히 바라고 원해도 결국은 비켜가야 하는 것이 그것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공허는 진실한 사랑의 결핍과 가깝다. 영화는 프레디를 통해 끝내 공허의 진실을, 그 잔인함을 낱낱이 폭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면서도 마지막 공간은 조금 열어두는 것 같다. 바로 음악을 통해서. 처음 한국 숙소에 도착했을 때도, 자기에게 마음을 바치겠다는 어떤 남자의 고백을 받는 순간에도 "이 음악 좋다!"라며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음악에 반응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는 직접 작곡한 곡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런 프레디가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결국 지나치지 못하고 마주하는 것은 ‘처음 보는 악보’이다. 처음 보는 악보는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프레디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별 망설임 없이 악보 앞에 앉아 연주한다. 한 음, 한 음, 서툴지만 끝까지.
삶에서 어떤 방법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다. 단지 그에 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걸,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것도 끝내 슬픈 사실이라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삶의 본질적 공허는 어떻게 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해결할 수 없었다. 대신 두 번째 질문을 만들어 남기기로 한다. 영화가 공허라는 개념을 마주할 수 있도록 허락한 따뜻함인 것 같아서. 그 질문은 이것이다. “채울 수 없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