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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Nov 11. 2023

그림책 키워드 인터뷰 / 자유로운 풍경에서 발견한 컬러

'From christmas to my birthday' 문정인 작가

작가가 자신의 그림책에 어울리는 키워드를 선정하고, 해당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인터뷰입니다.



 


#뉴욕 #자유로움 #컬러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야기하려고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그림책과 만화책을 만들고 있어요. 프랑스에 살면서 가끔 서울을 오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왜 하필 그림이란 수단을 선택하셨는지 듣고 싶어요.


사실 어렸을 때 오랫동안 소설가가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글을 잘 쓰기도 했고, 책을 좋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글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미지를 함께 다루는 장르를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과 그림으로 그리는 것에 표현의 차이가 있는데, 저는 그림이란 매체는 글보다 덜 직접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렇다면 내가 꼭 유쾌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더 잘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배경 때문에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림책과 만화책'을 만든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더 끌리는 장르가 있다면요?


그럼, 만화책이요. 그림책은 의미를 함축적으로 드러내지만, 만화책은 그림책보다 더 설명적이라는 특징이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그림책은 시에 가깝고 만화책은 소설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저는 시보다 소설을 좋아하거든요. 오랜 시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처럼 긴 이야기가 더 끌려요.



어릴 때 만화 많이 보셨나요?


90년대생이라면 공감할 당시에 유행했던 투니버스에서 방영했던 만화들이 있는데, 또래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애니나 만화들을 저는 하나도 안 봤어요. 대신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나 이희재의 <아홉 살 인생>같은 시대물, 최규석의 <100도씨>와 강풀의 <조명 가게>, 허영만 <식객>,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 같은 만화를 즐겨 보았고 <사이시옷>, <십시일반> 같은 학습 만화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어쩌다 그림책 학교에 가셨나요?


실은 연출하는 법을 더 배우고 싶었어요. 정확히는 영화를 하고 싶었죠.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는 투자도 받아야하고 사람들도 많이 필요하고 규모가 크기 때문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림은, 일단 나 혼자서 시작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만만하게 여겼나봐요.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데 그림책 학교에 가서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 ‘만만함'을 풀어 말하면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일거예요. 그런 마음으로라야 무언갈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영화가 더 만만해 보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림책을 공부하며 특히 배경 그리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럴 때 ‘이게 만약 영화라면 다 찍으면 될 텐데'라는 생각도 했었죠. 



서울에서 그림책 공부를 하시고 프랑스로 가셨어요. 이런 결정을 하게 되신 과정이 궁금해요.


그림책 학교에는 보통 직장인이나 대학교 학부를 마친 연령대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저는 그 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이가 10대 후반이었어요. 꽤 어린 편에 속했죠. 어려서였는지 순수해서였는지, 가끔 제가 충분히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무작정 가르침에 따라가는 게 우선인 것처럼 느껴져서 벅찰 때도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배움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림책 학교 과정은 마쳤지만, 혼자 작업을 발전시켜 나갈 힘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느꼈고 더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림을 배우는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그랬겠다 싶기도 해요. 어떤 걸 배울 때 그 내용을 어느 정도 거르는 자기만의 기준이 필요하잖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결과적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한국에서 배운 것과 프랑스에서 새로 배우는 것들을 융합해 나가는 과정이었어요. 이 기간이 2-3년 정도 걸렸어요.



한국과 프랑스에서 수학한 내용은 어떤 방식으로 달랐나요?


예를 들면 프랑스 학교에서는 과감하게 힘을 빼고 그리는 낙서를 권장하는데, 그런 부분이 처음엔 낯설었어요. 하다 보니 이런 방식이 저와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요. 어떤 작업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그림의 목적이나 주제를 생각하고 정확히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우선은 손이 종이 위에서 자유롭게 노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어요. 그런 시간엔 나를 옥죄는 생각이 들어설 틈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습작을 계속 하다가 어느 순간 특정 주제를 파고들어야 할 때가 왔다고 느끼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거죠. 이런 방식이 되게 좋았어요. 




KEYWORD 1. 뉴욕

 

 

첫번째 키워드는 하지만 한국도, 프랑스도 아닌 뉴욕이네요.


에피소드가 있어요. 뉴욕에 갔던 바로 전 해에 남자친구와 크리스마스를 프랑스에서 함께 보내고 어떤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프랑스는 크리스마스가 한국의 추석과 비슷한 개념의 명절이어서 가족, 친척, 친구들 등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요. 밥도 오랜 시간 먹고 계속 함께 있고요. 그런데 저는 낯선 사람들과 같이 오랜 시간 있는 상황을 그렇게 편하게 느끼는 성격은 아니라서 한 번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나니까, 다시 그런 방학을 보낼 생각을 하니 막막하더라고요. 그러다 작년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 마침 뉴욕에 사는 친구와 타이밍이 맞아서 친구를 보는 겸 뉴욕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작가들의 여행 드로잉이 신기해요. 그림을 업으로 삼는 작가들에게 그건 또 하나의 일이 되는 것 아닌가요? 새로운 풍경을 보는 데도 시간이 부족할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그때 시간이 많았어요. 계획 없이 일단 갔거든요. 그래서 뉴욕에 있을 땐 매일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서 아침에 차를 끓여 마시고 센트럴파크를 뛰고, 친구가 어디 간다고 하면 따라가기도 하고, 저녁에 혼자 있는 시간에는 남아서 그림을 그렸어요. 원래 성격은 여유있는 편이 아닌데, 학교에서도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보니 전에 없던 여유가 마음을 채워줘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는 것과 책을 만드는 것은 어떤 면에선 또 아주 다른 과정이잖아요. 어쩌다 여행 드로잉북을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엔 목표가 없이 그림을 그렸고 책을 만들 생각도 없었어요. 하지만 결국 만들게 된 이유에 몇 가지가 있는데, 친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어떤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었을 텐데 크리스마스 방학 기간에 저를 잘 챙겨주고 보살펴 주었으니까요. 그래서 친구와 함께 지내며 그린 그림들을 모아서 만든 책을 친구에게 ‘짜잔' 하고 선물처럼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이유도 있어요. 이 그림을 보여줬을 때 사람들 반응이 좋았거든요. 그래서 좀 더 정돈된 형태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여기 남긴 기억들이 날아가기 전에 어떤 형태로 붙잡아두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뉴욕은 어떤 도시인가요? 한번 가보고 싶어요.


저에게도 뉴욕은 막연히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어요. 딱히 환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막상 가기로 결정하니까 센트럴파크라든가 타임스퀘어 등 실제 모습이 어떨지 기대가 되었어요. 


가보니 '무서운 나라'였어요. ‘내가 뉴욕에 있었다면 겨우 판잣집에서 살지 않았을까, 그림 그릴 생각은 꿈도 못 꿨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모든 게 비싸서, 자본주의 극치를 경험하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림책의 많지 않은 텍스트에도 그 내용이 담겨 있어요.


 

물가가 어느 정도인 거예요?


함께 지낸 친구가 4명이 같이 사는 집에서 방 한 칸을 쓰는데 월세로만 200만원을 내더라고요. 특히 장을 볼 때 다 너무 비싸서 놀랐어요. 이렇게 기본 생계비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면 살기가 굉장히 어렵겠단 생각이 저절로 들었어요.


재료를 살 돈이 없으면 음식을 요리할 권리조차 없고 한 끼 편하게, 기름지게 먹기도 힘들겠단 생각에 충격이 컸어요. 프랑스는 학생 지원이 많아요. 국립 박물관은 무료입장이고, 유학생 월세 지원도 가능하고요. 하지만 미국 미술관은 학생도 입장료가 똑같아요. 아무래도 학생인 친구와 함께 지내며 가까운 곁에서 생활의 고충을 듣다 보니 뉴욕의 이런 면을 더 집중해서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아요.



차라리 사 먹는 게 낫나요?


비슷한 것 같아요. 미국인들이 왜 피자를 많이 먹는지 알 것 같았어요. 피자 한 조각이 정말 크고 많은 종류가 있고, 한 끼를 때우기 용이하더라고요.   



 

인상적이었던 뉴욕의 또 다른 풍경이 있었는지도 궁금해요.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다양성이요. 프랑스와 비교가 안 돼요. 미국을 ‘이민자의 나라’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다양성이 이 도시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어요. 다양성이 정체성 이려면 다양성이 포용 되어야 하잖아요, 제가 느끼기엔 프랑스도 다양성을 잘 포용하는 편은 아니에요. 프랑스는 동양인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래서 프랑스에 사는 동양인들도 ‘내가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요.  



 

하지만 뉴욕은, 저는 여행자였는데도 사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대한다는 걸 단번에 느꼈어요. 동양인들이 이 도시의 일부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느낌이랄까. 확실히 동양인도 많고 길을 다니는 사람들의 스타일부터 굉장히 다양해요. 어쩌면 ‘뉴욕 스타일'이라는 게 없다고 봐도 될 거예요. 그래서 다양한 옷을 입은 행인들을 많이 그렸어요. 





KEYWORD 2. 자유로움 


두 번째 키워드 ‘자유로움'은 그리는 방식에서 자유로움을 말하는 건가요?


네. 저는 원래 컬러를 거의 쓰지 않는 편이고, 쓴다면 한두 가지의 컬러만 써요. 그런데 이번 드로잉북은 원색을 포함해서 다양한 컬러를 자유롭게 썼습니다. 



아무래도 뉴욕의 다양한 풍경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뜻하지 않게 얻게 된 재료 덕분인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 학사 졸업장을 가져오면 마카세트를 학교에서 증정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때 받은 마카세트를 뉴욕에 갈 때 한번 써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원색 위주로 몇 가지 색을 골라갔어요.



원래도 여행 가서 드로잉을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익숙한 길을 다닐 땐 감각이 무뎌져서인지 그리고 싶은 게 많진 않더라고요. 그런데 여행지에 가면 그리고 싶은 게 많아져요. 뉴욕에 갔을 때도 그저 눈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신기한 마음에 막 그렸어요.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그리는 그림'이 갈수록 더욱 어려워진다고 느껴요. 그림은 결국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하는 시각 매체라, 보인다는 행위를 배제하고 시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져서요.


공감해요. 저도 처음부터 이 드로잉북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그릴 수 있었어요. 제가 가진 드로잉 노트 중에서 ‘못생긴 노트’라 일부러 제목을 지은 것도 있었어요. ‘여기 들어 있는 거는 못생긴 거고, 이건 아무한테도 보여주는 게 아니야.’라는 나름의 룰을 정해서요. 지저분하게 그린 종이 위에 더 채워서 그리는 방식으로, 두세 권 정도 더 썼던 것 같아요.



‘못생긴 노트'라니, 너무 재미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그리는 단계에서 자유로웠어도, 드로잉북을 제작할 때는 어떤 기준이 필요했겠죠?


편집하는 과정에서 글이나 티켓, 영수증과 같이 드로잉북에 전형적인 문법이 될 수 있는 요소는 빼는 대신, 웬만한 그림은 거의 다 넣으려고 했어요. 독자가 그림을 더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요. 제가 만들고 싶은 책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골라 넣었어요.


책의 흐름은 날짜를 기준으로 기획했어요. 일단 첫 장은 첫날이고 마지막 장은 마지막 날이에요. 중간에는 순서가 바뀌는 날이 있지만, 최대한 날짜별로, 어울리는 풍경들끼리 배치하려고 했어요. 한 페이지에 모여있을 때 재미있는 요소를 같이 놓거나, 페이지를 넘길 때 특정한 그림 다음에 오면 조화로울 다음 그림을 넣어 흐름을 잡는 식으로 작업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지루하지 않은 방향으로요.






제가 이 책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한데요, ‘여행 드로잉북'이라는 부류는 필수적으로 어떤 낭만성을 띠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 낭만성이란, 사실은 작업을 하는 과정은 그렇지 않은데 그림을 그리고 여행을 기록한 과정이 자유롭다는 이미지를 남기게 된다는 점에서요. 작가의 경험담을 기록한 결과라는, 아직 정제되지 않은 형태를 책으로 남긴다는 점에서 그 목적이 불분명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물론 작가의 개인적인 기록으로 충분하다면 모르겠지만, 책이란 결국 타인에게 보이는 어떤 목적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여행 드로잉북은 어떤 목적을 띠어야 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질문은, 저도 여행 드로잉북을 만들고 싶은데, 그 목적이 아직 불분명하여 하는 거예요.


맞아요. 말씀드렸듯 제가 전형적인 여행 드로잉북의 문법을 탈피하고 싶었던 이유도 이런 부분에서였어요. 대부분의 여행 드로잉북이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 위주로 기획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작가가 장을 본 영수증이라던가 박물관 티켓 등은 그 경험을 한 본인에게는 특별한 무엇이겠지만, 구체적인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독자에게는 의미가 약한 이미지일 수 있거든요. 그런 이미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기도 하고요.  

여행 드로잉북을 만들 때 독자를 고려한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가’를 분명하게 알고 만드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하지만 작업 시작 단계에서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 그림이 딱딱해질 수 있으니 우선은 자유롭게 그리고, 편집할 때 독자 혹은 에디터의 입장으로 접근하는 거죠. 어떤 여행지에 가서 모두가 그리는 풍경이나 조각상을 예로 든다면, 그 대상을 내 그림으로 다시 그려 보여주었을 때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는지, 넣을 가치가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해요. 같은 풍경을 나만이 그릴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로 그렸다면 넣었을 때 오히려 흥미롭겠죠.


그래서 저도 이번 책이 지루해 보이지 않도록 사람들이 재밌다고 말했던 그림 위주로 구성하고, 책날개 양쪽에 물탱크가 달린 건물을 하나씩 넣기도 하는 방식으로 이것저것 시도해 봤어요. 특히 드로잉북에서 뉴욕이란 소재는 이미 자주 보았던 만큼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아요. 




KEYWORD 3. 컬러  

아까 컬러에 대해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세 번째 키워드네요. 작가님 작업에서 컬러란 어떤 의미인지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색이 많은 그림을 볼 때 시끄럽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을 방방 뜨게 만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원하는 그림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흑백 그림이나 흑백 영화를 더 좋아했고요. 


대개 사람들은 컬러를 쓰라고 해요. 특히나 대상 독자가 아이들인 경우가 대부분인 그림책 작가들은 그림이 무서워 보이거나, 아이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주변의 목소리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죠. 판매로도 이어지는 부분이라서요. 제가 흑백 작업을 주로 했던 건 이런 상황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우연히 마카세트를 받게 되고 뉴욕에 가서 어떤 기준이나 경계 없이 그림을 막 그리다 보니까 무언가가 트인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그린 그림을 책으로 만들고 다시 정리해 보면서 제가 색을 쓰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지금은 물감을 쓰고 있어요.



새로운 풍경이 안겨준 선물이네요.


뉴욕 여행을 기점으로 컬러를 쓰기 시작하고 있으니, 큰 경험이 된 거죠. 



그다음 책은 컬러를 기대해 볼 수도 있겠어요. 


저는 이 드로잉북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풍경이 새로운 그림을 나오게 한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어떤 작가가 특정한 풍경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그림을 그렸겠구나’ 생각하기도 하고요. 집을 떠나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은 작가들도 있잖아요. 



작가님은 프랑스에 있다가 한국에 가셨으니 분명 한국에서만 살아온 사람들보단 새로운 풍경을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새로운 풍경이 더 필요한가요?


새로운 풍경이라는 게,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뜻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제주도 출신이어서 프랑스에 1년 있다가 제주도에 오랜만에 다시 갔는데, 우연히 산에서 말 대가족을 만났어요. 어려서부터 나고 자란 곳이니까 절대 보지 못했던 풍경이 아닌데, 타지 생활을 오래 하고 나서 보니까 너무너무 새로운 거예요.


그렇게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오히려 저는 해외에서 살고 나서 한국적인 게 무엇인지 눈에 보이기 시작해요. 가령 시장 바가지나 요구르트 아주머니 같은 대상이 한국적인 것으로 이해돼요. 한국에 나가면 거기 살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더라고요. 아름다워 보이고.



어쩌면 새로운 풍경이란 사람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겠어요. 작가님 얘기를 들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시간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시간은 똑같이 흐르지만, 개인이 느끼고 소화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감각되는 것처럼. 장소도 그런 면이 있네요.


작가님만의, 요즘 화두가 있으세요?


저는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좋은 작업이란 무엇인가요?


내가 설득되어야 해요. 내 작업에 확신이 없으면 스스로 제일 잘 알기 때문이에요. 작업의 정체성과 독창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내가 설득될 때까지 멈추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떳떳해야 해요. 저는 이게 바로 진정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을 그리며 이게 진짜 나의 것인지 생각해요. 좋은 그림은 그리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요. 그렇지 않은 것들은 조금 찝찝하고요. 내가 설득이 안 된 거예요. 그래서 나의 것을 찾아가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제가 작업하는 방식으로는, 스타작가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고전이 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 시간에 돈이 없을 거라는 걸 인정하고 이 시간을 잘 견뎌야겠다고, 요즘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이 그림책에서 마음에 드는 한 장면과 이유를 얘기해주세요.


뉴요커들을 마구 겹쳐 그린 페이지요. 제가 느꼈던 뉴욕의 다양함과 다소 정신없고 혼잡한 분위기가 잘 드러난 것 같아요.



문정인 작가




그림책 재료로 어떤 걸 사용하시나요?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은 펜과 검은 잉크. 요즘엔 컬러를 테스트해 보느라 과슈를 함께 쓰고 있어요.



주로 작업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무조건 많이 봐야 해요. 많은 작가가 본인의 경험과 생각에서 영감을 얻을 텐데 그러려면 그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림이든 소설이든 현대미술 전시든 영화든, 막힐수록 이것저것 많이 찾아봐요. 그럼 자연스럽게 ‘작업 하고 싶다!’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작업을 하며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인가요?


좋은 점은 내 이야기를 물성이 있는 것으로 세상에 남길 수 있다는 것. 또 그것이 대중 친화적이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책’이 된다는 것. 또 작업할 때 몰입의 순간이 너무 즐거워요. 팟캐스트나 음악을 틀어놓고 무아지경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요. 

나쁜 점은 오래 앉아있다 보니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어렵고 그래서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기 쉽다는 것, 특히 손목 어깨 목 허리요. 그래서 요새 코어 운동을 시작했어요. 또 월급이 없는 것!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요?


고전이 되겠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저는 고전이 되는 작업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그림도, 이야기도 꾸밈이나 허세 없이 담백하고 진정성 있게. 



좋아하는 그림책 한 권 추천해 주세요.


너무 많아서 어렵지만 요즘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고정순 작가님의 <관리의 죽음>이에요. 안톤 체호프의 글에다 그림을 그린 작품인데 정말 자유로워요. 글에서도 그림에서도 전형적인 그림책의 문법을 모두 탈피한 책이 아닐까 싶네요. 낙서 같기도 한데 또 거기서 나름의 균형과 구성이 있고. 흑백 작품이기도 하네요.



작가님의 다음 작업은 어떤 그림책이 될까요?


2023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작인 가 내년에 한국에서 나올 예정이에요. 페이지가 갈라지며 각자만의 풍경을 만들 수 있는 참여형 그림책이에요.



나에게 그림책이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 이거 재밌지? 이거 좋지? 같이 보자! 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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