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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Jun 23. 2024

[그림/작업 에세이] 4. 자유 속의 몸짓

빌렘플루서 ‘몸짓들’ 리뷰

누웠던 몸을 일으킨다. 간단한 스트레칭 후에 방의 불을 밝힌다. 커피포트에 물을 넣는다. 물이 끓는 동안 크기가 다른 서너 개의 드로잉북을 꺼내어 들춰 본다. 커피를 타서 책상 옆에 놓는다. 샤프를 꺼내 몇 번 눌러보며 심을 확인한다. 샤프 끝을 종이에 갖다 대고 긋는다. 자국이 생기는 이때부터다, 그림이 ‘진짜로' 그려지기 시작하는 때는. 그림을 그려내는 가장 유의미한 일이 그리는 행위라는 사실은 이토록 자명하다. “그리는 몸짓의 의미는 그려지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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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플루서의 책 ‘몸짓들’은 글쓰기의 몸짓, 사진 촬영의 몸짓, 면도의 몸짓, 음악을 듣는 몸짓 등 다채로운 유형의 ‘몸짓'에 관해 분석한 내용을 다룬다. 특히 ‘그리기의 몸짓' 파트에서 저자는 서구적 세계관(현상을 분리된 요소들의 결합이자 종합으로 보려는 태도)에 맞서 다른 분석 방식을 제안하며 이론을 펼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그리기의 몸짓을 분석하기 위해 화가와 붓, 캔버스나 발의 움직임 등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거나 영향을 주는 요소 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몸짓을 분석하기를 경계한다. 그에게는 이러한 방식의 설명은 쓸모가 있을지언정 ‘만족스럽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과관계에 의한 설명은 분석 대상을 ‘문제'로 인식하지만, 대상의 의미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둔 분석 방식은 대상을 ‘수수께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문제는 제거되어야 하지만, 수수께끼는 더 풍부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기의 몸짓을 관찰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그 과정 속에서 종합으로서 하나의 그림이 ‘나타나는', 화가와 재료의 그 어떤 비밀스러운 접합이 아니라 그리기의 몸짓이다. … 이런 견해는 전통적인 서구 세계관과 일치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구체적인 경험과는 쉽게 일치된다. 화가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아마 그리기의 몸짓 속에 있을 때만 자신을 진짜 화가라고 느낀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붓을 들고 캔버스를 마주할 때에만, 정말로 살아 있다고 말할 것이다.” (98)

“이 사실은 단순하다. 구체적인 그리기의 몸짓이 있는 것이고, 화가와 붓이 이 몸짓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99)

저자가 이처럼 드러나는 실제를 있는 그대로 보는 태도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리기의 몸짓이 가진 의미를 기존의 분석 도구로는 자신의 기준에서 충분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암호 해독, 의미론적 차원의 분석 방법을 소개하며 그리기의 몸짓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내용에 닿고자 한다. 즉 미래와 자유에 관한 해석으로.

“그것(그리기의 몸짓)은 ‘자유로운' 움직임인 것이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그 몸짓이 그 의미로부터, 그 미래로부터 비로소 만족스럽게 설명 가능하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하나의 자유로운 움직임이고, 현재로부터 미래로 손을 뻗는 것이며, 바로 몸짓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93)

그리기의 몸짓과 미래와 자유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화가의 몸짓은, 그가 그리려 하는 그림이 완성되지 않고도 그림이 된다는(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이는 ‘선취’이다. 또한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를 바라보고 물러서는 움직임을 계속 취한다는 점에서 이 몸짓 자체는 자기 비판적(자기 분석적) 성격을 띤다. 의미를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재설정하는 과정에 있는 그리기의 몸짓은 자신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필히 주체와 미래를 포함하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이 몸짓은 자유를 향한다. 이러한 근거로 저자는 논고 초반에 불쑥 꺼냈던 “그리기의 몸짓은 자유로운 움직임"이라는 명제를 말미에 한 번 더 제대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은 그러나 자유에 대해서 말하려는 시도와 다름 아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바로, 의미를 갖고, 의미를 주고, 세계를 변화시키고, 타인을 위해서 거기 있는 것, 한마디로, 참으로 사는 것이다. 자유는, 선택의 조건이 많을수록 자유가 더 커진다는 의미에서의 선택의 기능이 아니다. 화가는 자신이 기관차 운전사나 도둑이 될 수도 있었음을 ‘알면', 그 몸짓 속에서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 화가는 자신의 붓과 자신의 마음이 자신에게 부과한 경계선을 넘어설 때 그 몸짓 속에서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미래에 대한 자기 분석적인 가리킴이다. 그리기의 몸짓 자체가 자유의 한 형식이다. 화가는 자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유 속에 있다. 그는 그리기의 몸짓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참으로 거기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102)

아직 어떤 생각이나 이념, 감정에 오래 혹은 깊이 빠져들 필요가 없었던 어렸을 적에, 나의 손은 시간이 날 때마다 백지를 채우거나 무언가를 깎고 뭉치고, 다듬고 붙이며 움직이는 상태에 있었다. 방학 숙제나 텔레비전에서 간헐적으로 방영되던 아동 미술 프로그램, 아니면 교과서의 여백이나 일기장 등 내게 주어진 계기는 무엇이라도 기회고 무대-관객이 필요 없는-였다. 그런 몸짓에는 의도나 목표가 없었다. 작은 손은 그것이 지닌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부지런했으며 그저 움직이는 손에는 의식이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작업자로서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던 건 조건 없이 움직였던 그때의 손, 몸이었다는 것을. 많은 것 중에 고른 결과가 아니라 먼저 주어졌던 일. ‘작업을 하고 싶어서, 예술을 동경해서’ 따위의 이유는 없어도 되었던 날들. 사랑해서 아예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마음은 알 필요가 없었던 순간들. 안으로 자처하여 들어가, 어둡다고도 생각 않던 순수한 터널에 두려워하지 않고 머무를 수 있었던, 자유 속에 있는 나.

그림 그리기가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 차원보다 육체적 차원에서 선행된다는 사실이나, 화려하게 정제된 의식이 아닌 서툴고 못생긴 우연에 가까운 무의식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의외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나와 이 세상을 조목조목 이해하고 싶었고 이해되는 세계에서 살고 싶었기에. 한때 평론가와 큐레이터에 관한 진로를 고민했던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끝내 지금에 이른 이유는 아주 과거에 있었던 짙은 농도의 체험 때문이라 예상하고 있다. 나의 생각하는 의지가 팽창하던 때에도 그러한 경험과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때를 맞춰 나를 끌어당겼다면.

캔버스에 펼쳐진 세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작가가 철저히 직조한 결과인 줄로만 알았던 때, 그림의 출발점은 작가의 경험과 기분, 생각과 감정, 마음과 의도라고 생각했다. 시작하고 싶었던 나는 그림이 되어줄 만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정신의 목소리를 가꾸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 활발히 움직이는 정신은 번뜩여 보이는 영감 몇 가지를 건져 올리기도 했지만, 올무가 되기도 했다. 형상보다 의미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앞선 손은, 그림을 그리기보다 쓰기에 집중했고 그려지지 않은 그림에는 당연히 말할 의미가 없었다. 그 올무에서 빠져나온 이후에도 내가 겪은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체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고 목격해 왔다. “사변이 창작을 압살하는”** 상태가 어떤 지경인지 보여주는 평범한 사례에서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냥, 그리는 것이다.

형태부터 보여줄 수 있다면, 의미를 만드는 일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무언가를 극복하려는 기분으로 생각 없이 움직이는 상태를 상상하며 그림을 시작할 때가 있다. 빌렘 플루서의 글을 통해 이제는 작가로서 나의 몸짓이 자유와 다름없음을 기억하려 한다.

책 속 문장을 가져와 글을 쓸 때 우려되는 부분은 저자의 원래 의도가 일정 부분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 점 때문에 아래에 한 문단을 더 첨부한다. 내 글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내적 원동력과 몸짓과 결과를 쓰는 데 그치지만, 빌렘 플루서가 바라는 의미는 훨씬 멀리까지 나아간다. 여기에는 그가 기존의 연구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분석 안을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도 들어 있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해석의 틀로는 구원이 가능할, 세계와 미래를 긍정하는 그의 확신이.

“만약 몸짓에 대한 일반 이론, 즉 몸짓을 판독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론적 학문 분야가 존재한다면, 미술비평은 아마 오늘날처럼 경험론이나 ‘직관'의 문제, 또는 미학적 현상을 인과론적으로 해설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림으로 굳어진 몸짓들을 정밀 분석하는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안무학'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아마 더 나은 전략은 몸짓 자체를, 그것이 우리 앞에서, 그리고 우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 그것을 자유의 한 사례로서 관찰하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우리 전통이 우리에게 씌워놓은 객관화와 추상화라는 선입견의 안정을 벗고서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세계는 다시 ‘빛나고', 구체적인 현상들의 광채 속에서 반짝일 것이다.” (103)

나는 설명하고 싶지 않고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 요즘 부닥친 문제이다. 유창하게 말하기를 포기한 지는 오래됐고 이제는 더듬는 작가 노트조차 쓰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설명해 주길 원하고 설명이 없으면 등을 돌려버린다. 그럼 나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기로 선택한다. 그를 위한 말을 찾기보다 그냥 떠나라고 말한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나는 이제, 안전한 비관과 의심으로 말을 마치는 행위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렘 플루서의 방식으로 쓰여지는 글과 말, 삶이라면 이쪽으로는 더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이토록 자연스럽고도 과감히 그리는 미래에 관한 기대라니. 어떤 비관이라도 들어설 틈을 간단히 막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같은 편으로 아무렇지 않게 돌려놓기까지 한다. 나는 그의 글을 통해 이제 차라리 아주 환하게 빛나는 빛을 따라가 볼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중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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