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화해할 수 있을까.
요즘은 말조심을 해야 하는 세상이다. 특히 정치 이야기는 가장 조심해야 할 화제이다. 상대도 나와 생각이 같을 것이라 생각하여 덜컥 말을 꺼냈다가는 거세고 긴 항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생각이 다른 것에 대하여 유도리가 없는 세상이다. 정책이나 인물에 대한 평을 함부로 꺼냈다가는 당신 알고 보니 그쪽 사람이었어? 하고 딱지가 붙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나와 다른 편은 적으로 취급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넘어 이 사회에 부정적인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나는 안국동에 산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안국동에서는 계엄을 일으킨 대통령의 탄핵에 대하여 연일 찬반 집회가 열렸다. 찬성을 하는 파도, 반대를 하는 파도 판결에 영향을 주고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려 최대한 인원을 끌어 모았다. 커다란 무대와 스피커를 설치하고 연일 구호를 외쳤다. 안국역 사거리에서 낙원상가로 향하는 길에는 탄핵 반대 시위대가, 광화문 가기 전 송현공원 입구에는 찬성 시위대가 상주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작은 확성기를 목에 걸거나, 스피커를 리어카에 싣고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며 큰 소리로 시위를 했다.
대로변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는 나의 사무실에서는 찬반 각 시위대의 구호 소리와 길 아래에서 확성기로 떠드는 소리가 서로 얽혀 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들렸다. 다들 스피커 볼륨을 최대로 높여 놓았는지 사무실에서는 창문을 닫고 있어도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런 소음 속에 한 달을 넘게 지냈다. 탄핵 선고가 늦어지자 양측 시위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과격해졌다. 안국동 거리는 시위대로 가득 찼고 양 진영의 작은 충돌로 감당하기 힘든 큰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여섯 개의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가 섞이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무슨 새끼 무슨 놈 하는 욕이 전부이다. 차근차근 잘 알아듣게 말을 해도 될 텐데.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해도 될 텐데. 자기의 스피커 소리를 줄이고 상대방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텐데. 지금에야 이런 생각이 들지만 당시의 안국동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내가 죽거나 네가 죽는 전쟁터에서 포탄 세례를 퍼붓는 것처럼 서로는 말폭탄을 던지며 상대가 전멸하기를 원했다.
대한민국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나는 두 진영으로 갈린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양심이나 도덕, 상식의 기준을 지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같은 자리에 있는 것조차 불편해질 정도로 의견이 다르고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된 것은 서로 믿고 있는 팩트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국의 정치적 편향은 '마치 커다란 장독대에 얼굴을 묻고 큰 소리를 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항아리 안에서 큰 소리를 지르면 그 소리가 항아리 내부에 반사되어 자기 귀에 더 크게 들린다. 우리는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매체를 통하여, 듣고 싶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듣게 된다. 알고리즘은 비슷한 성향의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추천하기 때문이다. 매체는 다양해졌지만 정작 나와 다른 의견, 다양한 의견은 예전보다 더욱 접하기 힘들게 되었다. 각자의 '사실'에 대한 확증편향이 강화되고, 사실에 다르니 의견이 좁혀질 리 없다.
말조심을 해야 하는 사회는 살벌하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편가르는 사회에서는 톨레랑스(관용)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예민해져 있고 화가 나 있다. 우리 사회는 톡 하면 빵 하고 터질 것 같은 빵빵한 풍선 같다.
우리가 언젠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기는커녕, 서로의 얼굴도 보기 싫다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시간이 약일까. 그럼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 꼬라지를 언제쯤 벗어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