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출판사 편집 전)
1. 부족한 책 읽기
2004년 여름 대학을 졸업한 저는 지금 인문·사회과학 서적보다는 경제서나 실용서 그리고 신간 베스트셀러들을 위주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시작되어 올해로 7년 차로 접어드는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아서 자기개발(自己開發)에 대한 압박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터라, 퇴근 후에 가끔 정신없이 종로나 강남 등지의 대형서점에 들러 대량으로 들어온 신간들을 들춰보거나 일간지 서평을 확인하는 것으로 얄팍한 책 읽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단지 회사생활이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에서 진정한 책 읽기를 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요. 하지만 가끔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주말이 되면 대학시절 열심히 읽었던 인문·사회과학서를 읽고 싶은 생각이 밀려옵니다. 마치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 심한 갈증을 느끼듯이 말이지요. 대학시절, 새내기 때는 다양한 교양서적을 2학년 때는 인문·사회과학서적을 열심히 읽어야지 하면서도 2월의 새터, 4월의 4.18 구국대장정, 5월의 대동제, 7월의 농활 등 일련의 학생회 활동과 술로 대표되는 선후배들과의 이런저런 자리로 인해 생각했던 것보다 독서량이 많이 부족했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군제대 후 복학생 시절은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책을 읽을 틈도 없이 쏜살같이 확 지나가 버렸지요. 그리하여 대학시절 부족했던 책 읽기는 평생 지고 갈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대형서점, 인터넷, 그리고 인문·사회과학서점
책을 읽겠다는 신념으로 도서관에도 가끔 들르지만, 저는 주로 책은 구입해서 읽는 편입니다. 그리하여 대형서점에도 가고,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도 하고, 그리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아직 남아있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에도 갑니다. 먼저 대형서점은 시내 중심가 넓은 공간에 많은 책들과 신간을 구비해 놓아 주로 약속 장소를 잡을 때 이용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마음 편히 책을 읽으라는 배려에서인데, 본의 아니게 늦어지는 경우 상대방에게 많이 미안하지 않아서 좋지요. 한편, 인터넷 주문은 무엇보다 간편해서 좋습니다.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도서를 택배로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가격이 조금 저렴합니다. 그래서 종종 이용합니다. 이때, 책을 단순한 상품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대형서점에서만 또는 인터넷으로만 책을 구입하겠지요. 그렇지만 책은 단순한 상품 이상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형서점에서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계산대의 직원들과 거래 외(外)적인 말은 한마디도 없이 단지 책을 돈이나 신용카드와 맞바꾸는, 소비자와 불특정 다수(多數)인 직원들 간의 거래행위만 존재합니다. 또한 인터넷서점은 온라인입금이나 신용카드 결제 등 무언(無言)의 과정만 존재할 뿐입니다. 클릭 한 번으로 구입은 끝나지만, 며칠 뒤 책이 배송되면 그땐 정작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하고 집안 책장에 덩그러니 꽂아두는 일도 생깁니다. 부끄럽게도 그날 구입하고 그날 읽지 않은 책들은 장식용으로만 존재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요. 그렇지만 이에 반해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단순히 책만 파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이야기를 함께 제공해 줍니다. 제공자와 독자가 각각 한 명뿐이지요. 책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세상 사는 이야기까지, 단지 책 한 권을 집었을 뿐인데 일대 일로 다양한 대화가 가능합니다. 편리한 세상이지만 그 반대급부로 대화가 단절되고 단골집이 줄어들고 있음을 볼 때, 이렇게 단순히 책 한 권을 구입하는 행위를 통해서도 사람과 사람 간에 책을 매개로 소통하여 삶의 중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인문·사회과학서점 같습니다.
3. 대학가(大學街), 그리고 ‘풀무질’
대학 새내기 시절 따뜻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던 학생회관에서 선배들을 처음 만나던 날, 그들이 저를 처음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학교 앞 인문·사회과학서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대학생이면 당연히 사회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자연스레 그 서점 근방을 자주 기웃거렸지요. 그게 자랑스러운 대학생활이라 믿었고, 대학생이면 으레 인문·사회과학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굳건하게 학교 앞을 지키던 ‘장백서원’은 그러나, 졸업 후 학내에 들어선 대형서점 탓인지 위태위태하게 명맥(命脈)을 유지하다 어느 날 제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당시 신촌 지역의 유일한 인문·사회과학서점이었던 ‘오늘의 책’도 새천년을 맞았던 2000년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와 신촌 일대를 돌아다니던 중, 문을 닫았다는 걸 알았지요. 대학가 문화공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점들이 ‘어제의 책방’이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대학은 이미 대학(大學)이 아닌, 산업(産業)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학은 그저 기능인만을 양산(量産)하고 있었습니다. 국제 감각을 갖춘 글로벌 리더도 좋고 기업형(型) 인재에 가까운 대학인도 좋지만 갓 대학에 들어온 새내기들이 올바른 역사의식(歷史意識)을 갖추지 못하고 사회불평등과 계급문제, 민족과 통일문제, 그리고 환경위기와 녹색대안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국제화와 세계화 그리고 기업 경영을 외친다면 그들은 그저 속은 비고 겉만 화려한 차가운 인재일 것입니다. 대학은 돈을 벌기 위한 직업훈련소가 아니라 공부하고 지식을 쌓는 곳이어야 하지만, 삶의 올바른 방향을 대학이 아닌 대학가(大學街)에 겨우 남아있는 주변문화에서 배우고 있는 게 지금 대학의 현실이지요. 그런 면에서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이 부럽습니다. 아직 이렇게 좋은 인문·사회과학서점인 ‘풀무질’이라는 공간을 갖고 있으니까요.
4. ‘풀무질’과의 인연(因緣)
고교시절엔 가끔 대학로 라이브 극장에서 공연을 보곤 했습니다. 故김광석의 “다시부르기Ⅱ”가 발매되던 1995년, 촌스런 신문기사와 같은 앨범사진이 담긴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던 늦가을의 대학로 거리는 편안한 어쿠스틱 포크음악의 선율처럼 아직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대학로라는 공간을 무척이나 동경(憧憬) 해왔던 것 같네요. 청춘시대의 막을 올리던 재수생시절에도 가끔 저는 혜화역 근방을 돌아다니며 어설픈 연애(戀愛)를 했습니다. 특히 수능시험이 끝나고는 매일같이 그 거리를 거닐다가 지금은 사라진 ‘상파울로’나 ‘벅시’와 같은 커피전문점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근방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책을 읽기도 했었지요. 대학로 근방엔 당시만 해도 서점들이 참 많았습니다. 명륜동에는 ‘풀무질’과 ‘논장’이 있었고, 그 외에도 몇 개의 서점들이 더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 당시 서점에 가면 특히 ‘문학과 지성사’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 시집을 주로 읽었지요. 그중 몇 권은 한 끼 밥값을 아끼면서도 꼭 구입해서 두고두고 읽었습니다. 그 해 겨울은 IMF 구제금융의 한파(寒波)까지 겹쳐 무척이나 추웠는데, 당시 읽었던 곽재구 시인의 “沙平驛에서”처럼 밤열차를 타고 따뜻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좁은 공간이었지만 언제나 따뜻함을 주던 ‘풀무질’을 자주 들렀던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에도 안암에서 선후배들과 낮술을 마시다가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으로 가끔 대학로에 혼자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선배들이 추천하던 조금 민망한 제목의 책 『유방의 역사』 (부제: 여성의 가슴에 대한 소유와 인식의 9가지 고찰, 매릴린 옐롬 저, 자작, 1999)를 사러 ‘풀무질’에 갔던 게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아주 부끄럽게 제목을 이야기하던 저와는 달리, 아저씨께서는 “아, 그거! 유방의 역사! 여기 있어요!” 라며 모두들 감추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어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다른 서점에서 그 책을 샀더라면 사는 저나 판매하는 분이나 모두 아무 말 없이 그저 멀뚱멀뚱하거나 혹은 눈도 못 마주쳤을 텐데 말이지요.
* 책과 일상(日常), 풀무질에서 구입한 대표적인 책들과 그에 얽힌 사연
1) 1999년 봄, 『글 읽기와 삶 읽기 <1>』 (조혜정 지음, 또 하나의 문화, 1992)
대학 2학년 시절 대학 선배로서의 책 읽기에 대한 반성으로 새내기들에게 사주던 책.
현재 소장하고 있는 책은 ‘풀무질’에서, 후배들에게 주던 책은 ‘장백서원’에서 각각 구입했었지요.
2) 2001년 여름, 『지리산』 (이성부 시집, 창작과 비평사, 2001)
이때부터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 종주(縱走)는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3년 유럽 배낭여행에 묻혀
2005년 여름에서야 드디어 저는 대학 선배, 동기들과 함께 지리산의 품에 안겼습니다.
3) 2001년 여름, 『자전거 여행』 (김훈 에세이, 생각의 나무, 2000)
이 책을 읽고 2006년 하기휴가 때 홀로 남도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서점에서 자전거 예찬론을 펼치던 병장시절의 제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4) 2002년 봄,『 꿈의 도시 꾸리찌바』 (증보판, 박용남 저, 이후, 2002)
제가 좋아하는 서울이 생태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염원(念願)으로 복학 직후 구입했던 책.
‘지속 가능한 개발을 통한 공동체 도시 건설’이라는 책의 주제가 풀무질의 이미지와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5) 2003년 여름,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 창작과 비평사, 1997)
누군가에게 빌려줬던 책인데 다시 돌려받지 못했음을 발견하여 유럽 배낭여행 직전 다시 구입했던 책.
유럽에서 귀국한 후에도 읽고 싶은 책을 사러 가장 먼저 들른 곳이 ‘풀무질’이었지요.
6) 2003년 겨울,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민음사, 2001)
이런 책은 인문·사회과학서점에서 아저씨와 몇 마디 주고받으며 구입해야 제 맛일 것 같습니다.
책 자체에 우리 시대의 삶과 꿈에 대한 13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요.
7) 2009년 가을,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 (임재천/김경범 외, 문학동네, 2008)
창덕궁으로 단풍놀이 갔던 날, 서점에 책이 있는지 전화로 문의한 뒤 명륜동까지 걸어가서 구입했습니다.
아저씨께서 친절하게도 미리 꺼내 놓으셔서 제가 서점에 들어선 순간 그 책은 주인을 맞이했었지요.
5. 명륜동 단골집
지하철 혜화역에서 내려 명륜동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제 단골서점인 ‘풀무질’이 여전히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이젠 저뿐만 아니라 작년 봄부터 저와 함께 발걸음을 함께 했던, 다가오는 새봄 아리따운 신부가 될 제 여자친구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 1층의 좁은 공간에서 길 건너 지하로 이동했지만 더 넓어진 공간 덕분에 들를 때마다 오히려 더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단골집이라 하면 다른 사람들은 대개 술집이나 음식점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독특하게도 서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거대한 서울에서 저를 알아주는 단골서점이 있다는 건 도시를 살아가는 저에게 크나큰 기쁨이거니와, 또한 그들과 함께 책을 즐기는 삶은 그 자체로도 진정 신나는 일이 아닐는지요. 그래서 어떤 목적으로 들르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동네가 바로 명륜동입니다. 그날도 그 길을 지나는 참에 읽고 싶던 책도 사고 아저씨 안부나 물을 겸 ‘풀무질’에 들렀습니다. 아저씨께서는 또 글을 쓰셨다며 A4 용지에 자신이 쓴 글을 친히 출력해 주셨고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도 해주셨지요. 특히 제 결혼선물로 문화상품권을 주신다는 말씀에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책에 묻어 있는 잔정(情)만큼,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따뜻함이 느껴지는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 다른 이들에게는 동일한 책일지 몰라도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있는 저에겐 그곳에서 구입한 책들은 대형서점에서 구입하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과는 달리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날 명륜동을 빠져나와 혜화역 개찰구에 들어가면서 저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 4호선에 탑승하자마자 구입한 책을 꺼내 읽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멋진 단골서점 하나 갖고 싶지 않으신가요?
2010년 1월 2일 경인년(庚寅年) 둘째 날 여유로운 오후, 멀리 흰 눈이 쌓인 북한산 인수봉을 바라보며
‘풀무질’ 단골손님
2010년 1월 2일, 前 풀무질 지킴이 은종복 님의 청탁을 받아 작성한 후 출판사 편집팀에 제출했던 글입니다.
* 출판사 편집본
마음 속 따뜻한 단골 서점, <풀무질>
대학가, 그리고 <풀무질>
대학 새내기 시절 따뜻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던 학생회관에서 선배들을 처음 만나던 날, 선배들은 저를 학교 앞 인문·사회과학 서점에 데려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 서점 언저리를 자주 기웃거렸지요. 선배들 덕분에 대학생은 당연히 사회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려면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굳건하게 학교 앞을 지키던 <장백서원>은 그러나, 졸업 후 학내에 들어선 대형 서점 탓인지 위태위태하게 명맥만 유지하다 어느 날 사라졌습니다. 2000년,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신촌 유일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던 <오늘의 책>도 문을 닫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학가 문화 공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점들이 ‘어제의 책방’이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대학은 이미 대학이 아닌, 산업이 되어 있었습니다. 대학은 돈을 벌기 위한 직업 훈련소가 아니라 공부하고 지식을 쌓는 곳이어야 하지만, 삶의 올바른 방향을 대학이 아닌 대학가에 겨우 남아 있는 주변 문화에서 배우고 있는 게 지금 대학의 현실이지요. 그런 면에서 성균관 대학교 학생들이 부럽습니다. 아직 이렇게 좋은 인문·사회과학 서점인 <풀무질>이라는 공간을 갖고 있으니까요.
<풀무질>과의 인연
고등학생 때는 가끔 대학로 라이브 극장에서 공연을 보곤 했습니다. 故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Ⅱ>가 발매되던 1995년, 신문기사로 처리한 앨범 표지 사진이 담긴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던 늦가을의 대학로 거리는 편안한 어쿠스틱 포크 음악의 선율처럼 아직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대학로라는 공간을 무척이나 동경해 왔던 것 같네요. 재수를 하던 1997년, 수능시험이 끝나고는 매일같이 그 거리를 거닐다가 지금은 사라진 <상파울로>나 <벅시> 같은 커피 전문점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근방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책을 읽기도 했지요. 대학로 언저리에는 당시만 해도 서점들이 참 많았습니다. 명륜동에는 <풀무질>과 <논장>이 있었고, 그 밖에도 몇 개의 서점들이 더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문학과 지성사>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 시집을 주로 읽었지요. 그중 몇 권은 한 끼 밥값을 아끼면서도 꼭 구입해서 두고두고 읽었습니다. 그해 겨울은 IMF 구제금융의 한파까지 겹쳐 무척이나 추웠는데, 당시 읽었던 곽재구 시인의 『沙平驛에서』 처럼 밤 열차를 타고 따뜻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좁은 공간이었지만 언제나 따뜻함을 주던 <풀무질>을 자주 들렀던 것 같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학교 근처에서 선후배들과 낮술을 마시다가 문화 예술에 대한 갈증으로 가끔 대학로에 혼자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선배들이 추천하던 조금 민망한 제목의 책 『유방의 역사―여성의 가슴에 대한 소유와 인식의 9가지 고찰』( 매릴린 옐롬 저, 자작, 1999)를 사러 ‘풀무질’에 갔던 게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아주 부끄럽게 제목을 이야기하던 저와는 달리, 아저씨께서는 “아, 그거! 유방의 역사! 여기 있어요!” 라며 모두들 감추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어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다른 서점에서 그 책을 샀더라면 사는 저나 판매하는 분이나 모두 아무 말 없이 그저 멀뚱멀뚱하거나 혹은 눈도 못 마주쳤을 텐데 말이지요.
명륜동 단골집, <풀무질>
지하철 혜화역에서 내려 명륜동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는 언제나 제 단골서점인 <풀무질>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이젠 저뿐만 아니라 작년 봄부터 저와 발걸음을 함께 했던, 곧 저와 결혼할 제 여자친구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골집이라 하면 다른 사람들은 대개 술집이나 음식점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단골 서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거대한 서울에서 저를 알아주는 단골 서점이 있다는 건 도시를 살아가는 저에게 크나큰 기쁨입니다. 책에 묻어 있는 情만큼,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따뜻함이 느껴지는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 다른 이들에게는 같은 책일지 몰라도 추억이 새록새록 묻어 있는 저에게는 그곳에서 구입한 책들은 대형 서점에서 구입하거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책과는 달리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멋진 단골 서점 하나 갖고 싶지 않으신가요?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은종복 지음, 이후, 2010 (176~178p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