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여름의 추억, 포근한 설악(雪嶽)

by freejazz


『A Prologue, 설악산(雪嶽山)은...』


설악산(雪嶽山)은...

올라갈수록 점점 더 새롭고

내려올수록 점점 더 그리워지는

그런 山인 것 같습니다.

그 포근한 품에 저를 안기게 해 준

그 해 여름의 설악(雪嶽)이 벌써부터 또 그립네요.




『여기는 한계령 정상입니다』, @한계령(寒溪嶺)

AM 03:35


밤늦은 시각 고속버스를 타고

양양(襄陽)에 내리니 새벽 2시 반,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44번 국도를 따라

설악산을 휘감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작년 여름 강원도를 크게 휩쓸고 간

폭우의 흔적이 새벽녘 44번 국도 곳곳에서

아직도 눈에 들어왔네요.

이윽고 남설악의 꽃 오색약수를 지나

택시는 한계령 정상에 우리를 떨어뜨려줬습니다.

그날 새벽 저는,

백두대간의 거대한 산줄기가

어스름하게 보이던 한계령에서

구름바다에 빠져있는 설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힘들 때마다 항상 포근하게 저를 감싸주던

설악산(雪嶽山).

남성성을 갖고 있는 외설악보다

여성성을 갖고 있는 내설악에서 느끼는

설악에 대한 감정이 그날따라 유난히 더 좋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한계령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감자 수제비와 우동을 각각 하나씩 먹고

통과의례처럼

산(山)에서 특히 어울리는 음악을 들었습니다.

하덕규 아저씨 작사/작곡 양희은 아줌마 노래 '한계령'.

한여름이었지만 새벽녘이라 날은 비교적 선선했었고,

휴게소 안에는

새벽산행을 하려는 사람들과 산악회 회원들이

조용히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노래를 한 번 더 들은 뒤 잠시 후

한계령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산행의 시작..

설악(雪嶽) 산행은

모성(母性)의 내설악과 부성(父性)의 외설악을

하나로 완성하는 것.

내남설악 한계령에서 내설악의 능선을 따라

새벽녘 모성을 느낀 뒤

대청봉을 두고 나 있는 외설악 길을 타고 내려가면서

설악의 절경을 감상하는 것이,

우리가 설악을 넘을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예의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새벽 4시 30분 첫 발자국을 디딘 후

랜턴을 켜고 한 시간 여를 올랐을까.

그제야 날이 차츰 밝아왔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서북능선

AM 06:30


서북능선길은 생각보다 고요했습니다.

아기자기한 능선길이 펼쳐짐과 동시에

이슬을 머금은 연보랏빛

금강초록꽃들도 피어있었네요.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가자 꽃들은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문득 도종환 시인(詩人)의 시집(詩集)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에 수록된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詩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 詩는 제가 詩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인,

대학 2학년 봄부터 군대 가기 직전까지의 시기에

제가 굉장히 좋아했던 詩였습니다..

그런데 그제야 저는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네요.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굳게 버티는

사랑과 삶의 의미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詩人의 詩集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문학동네, 1994 中

'흔들리며 피는 꽃' 全文




『저 山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대청봉

AM 08:25


어느덧 끝청봉에 도착했습니다.

새벽안개가 더욱 짙게 드리운 끝청에서의 주변 풍경은

구름이 걷히고 몰려오고를 반복하는 통에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정상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마냥 즐거웠던 산행길이었습니다.

이윽고 중청 대피소가 그 포근한 모습을 드러냈네요.

멀리에서도 대피소에서 아침을 맞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고,

조금 더 걸음을 옮기니 더 멀리엔,

대청봉의 모습도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천천히 주위를 보며 걷다 보니

드디어 대청봉에 다다랐습니다.

벌써 몇 번째 올라온 대청봉이었건만

그날 대청봉을 맞은 기분은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그저 잊으라고 잊어버리라고 제 자신에게 외치던

지난 시절과는 달리

그날의 대청봉은 지난 일을 잊긴 잊되,

새로운 희망을 가져도 좋다는

포근함을 제게 전해주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배낭에 넣어 두었던 팩소주를 꺼내서

한잔 쭉 들이켰습니다.

"저 山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나는 소주 한잔에 추억을 곱씹고

새로운 희망을 달라 하고"

그렇게 또다시 저는 설악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중청 대피소, AM 09:15


대피소 안에 詩人마을이 있던 중청산장(中靑山莊)

우리는 대충 끼니를 해결하면서

남은 소주를 다 마셨습니다.

대피소에는 춘천(春川)에서 왔다던

젊은 남녀 대학생 커플도 있었고

전역을 이틀 앞둔 말년병장을 비롯한

근방 군부대의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젊은 그들의 감성(感性)을 부러워하다가

대피소 앞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잠시 쉬며

음악을 들었습니다.

山에 올라오면 항상 단순한 포크음악과

코드진행이 간결한 록음악이 듣기가 좋았지요.

그날 중청산장 앞 벤치에서는

양희은 아줌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한대수 아저씨의 '하루아침'

故김광석 아저씨의 '바람과 나'

뭐 이런 류의 음악을 들었는데

山 위에서만큼은 저도

멋진 음유시인(吟遊詩人)이었습니다.

'한계령'의 가사에서처럼 저도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 싶었습니다.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천불동 계곡

AM 11:40


중청에서 소청으로 그리고 소청에서 희운각 대피소로,

이제는 下山이었습니다.

그제야 아침의 안개가 모두 걷히고

따가운 햇볕이 느껴졌네요.

천당폭포와 양폭포를 지나 양폭 대피소에 닿을 무렵

빨간색 철다리 들을 수도 없이 지나

지친 몸과 마음을 흐르는 계곡물에 맡겼습니다.

줄을 잇는 수십 길의 폭포와 웅덩이.

다양한 산세를 지닌 설악은 한 폭의 수묵화였네요..

기암괴석의 정교한 예술품은

험로마다 설치된 철난간과 사다리를 타고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졌습니다.

올라보면 까마득한 절벽인데

구름 한가로이 노니는 하늘 한 조각이 보이고

기묘한 바위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

그 사이사이로 철길이 나 있었습니다.

천불동 계곡의 위용에 압도된 저는

암반 위를 도도하게 흐르는 맑고 차가운 물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햇살이 따가웠던 그날 오후

천불동 계곡의 여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이 山 저 山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비선대 PM 14:10


한참을 내려갔을까.

저는 힘이 든 나머지

비선대 5.5km, 비선대 2.6km, 비선대 1.6km..

라고 적힌 나무 표지판을 만날 때마다

저를 다시 반겨줄 설악동 입구 반달곰을 만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 위로하며

산을 내려갔습니다.

'이 山은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네.' 라는

하소연이 내려가는 등산객들 사이에서 들려왔는데요,

정말 저도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비선대(飛仙臺)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선대에 올 때마다 행하는 통과의례.

이제 좀 쉬었다 가야지! 하며

시원한 계곡물에 두 손을 적셨네요.

비선대는 잠에서 깨어난 신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해서

유래가 된 바위 이름인데,

비선대 바로 앞에는 철계단을 타고

계곡을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계단이 나 있었습니다.

소공원에서 비선대까지는

설악의 초입(初入)을 즐기려는

피서객들과 관광객, 젊은 부부와 커플,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어서

우리와 같은 등산화에 배낭을 짊어진 등산객들보다는

슬리퍼나 샌들을 신고 가벼운 트레킹을 하는

관광객들이 더 많았습니다.

여유로운 얼굴로 비선대의 낭만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 섞여

저는 비선대 앞 계곡에 떠다니는 물고기들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떠도는 바람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습니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설악동 PM 14:45


이제 설악동 초입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자동차도 올라올 수 있도록 펼쳐진

잘 포장된 도로를 지나며

우리는 1박 2일에 걸쳐 대청봉을 찍고 내려왔다는

한 모녀(母女)를 만났네요.

山에서 만나는 분들은 모두

다 저마다 간직한 사연이 있는 동행자들이기 때문에

올해 겨우 여섯 살이라는 꼬맹이의 산행이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정겨운 인사와 함께 조금 더 힘을 내서 내려오니

어느덧 소공원의 초입,

동동주를 파는 술집촌이 나왔습니다.

'그냥 갈 수 없잖아요!' 라는 간판으로

수년 전부터 저를 자극했던 한 술집을 간신히 지나

우리는 결국 소공원 입구의 한 식당에서

감자전에 동동주만 간단하게 한잔하고

소공원을 빠져나왔네요.

설악동을 빠져나오기 전의 통과의례,

설악산 반달곰과의 반가운 인사!

그리고 이제 설악은 지친 제 어깨를 떠미며

속초 바닷가로 향하는 길을 재촉했습니다.

언제나 정겨운 설악동 입구 7-1번 시외버스.

설악동 A, B, C지구를 지나 버스는

속초 해맞이 공원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이미 바다보다 넓습니다』

@속초(束草) 동명항(東明港)


눈앞에 아련히 펼쳐지는 푸른 바다.

山과 바다와 호수와 햇볕이 있는

포근한 도시 속초(束草).

뜨거운 여름 태양아래 버스는

청초호(靑草湖) 앞 해수욕장에서 정차하고

우리는 바다를 보기 위해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속초해수욕장을

잠시 구경하다가 지친 심신을 쉬게 하기 위해

우리는 청초호를 한 바퀴 돌아 동명항으로 향했네요.

동명항의 자연산 회와 함께

속초여객터미널 앞에서 펼쳐지던 아름다운 풍경들.

영금정과 동명항의 밤 품경은,

설악에서 조금은 지친 제 맘을

넓은 바다와 같이 포근하게 달래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찾아간 청호대교 앞 아바이 마을

아바이 순대와 함흥냉면, 거기에 소주 한잔하고

갯배를 타고 마을 건너편으로 건너면서

설악산과 속초에서의 추억을

몸과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그렇게 山에서 내려와 바다를 찾은 우리들의 마음은

이미 바다보다 넓다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계령 정상에서』, @한계령(寒溪嶺)


속초에서 서울로 갈 땐

미시령(彌矢嶺)을 넘어 내설악 입구 인제(麟蹄)에서

44번 국도에 합류해야 하지만

그날 속초에서 출발했던 시외버스는 웬일인지

양양으로 다시 내려간 뒤

한계령을 넘었습니다.

이제는 설악산과 작별해야 하는 시간.

다시 눈에 들어온 내설악의 모습이

특히 포근하게 다가왔네요.

한동안 설악산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제 가슴과 제 눈에 설악(雪嶽)을

담아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계령을 다시 넘으려니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습니다.

山은 저에게 있어 영원한 화두(話頭)인가 봅니다...

계절이 바뀌면 곧 다시 만나요.

아쉬운 마음 가득 안고, 다시 한계령 정상에서…




『An Epilogue, 여행(旅行)과 술은...』


고속버스를 타고 갔던 여행길이라

운전에 대한 부담감이 없어서였는지, 저는

설악과 속초 여행기간 내내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여행의 초입, 고속버스 안에서 맥주 한 캔

설악산 정상, 대청봉과 중청봉에서 팩소주 하나

설악동 입구, 소공원에서 쌀동동주 반 병

동명항 횟집, 바닷가에서 소주 두 병

다음날 아침, 식당에서 반주로 소주 반 병

영금정 등대, 등대로 가는 길목에서 맥주 한 캔

아바이 마을, 순대에 함흥냉면으로 소주 반 병


가끔 술이 없는 여행도 나름대로의 맛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술이 있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물론, 적당한 음주로 많이 취하지는

않을 정도여야 하겠지요.

아무튼, 여행의 시작과 마무리를 술로 해서

술냄새를 풍기며 글이 마무리되지만,

그래도 여름의 향(香)이 더 진하게 나는

설악(雪嶽)의 품이

저는 아직도, 여전히 또 그립네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 속 따뜻한 단골 서점, <풀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