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면 꼭 사와”…중국인 관관객 인기선물 아몬드
'허니버터 아몬드'로 작년 매출 1400억원
팀장 9명에게 BMW 사준 중소기업
15년 전 빚 100억원 회사 살려내
“쩐 하오츠(真好吃·정말 맛있다). 중국 가면 이 가격보다 더 주고 사야 해요. 가족들이 한국 가면 아몬드 스낵 많이 사 오라고 했어요.”
서울 중구 봉래동에 위치한 롯데마트 서울역점. 외국인이 많이 가는 마트 중 하나다. 이곳에서 쇼핑을 하던 중국인 왕 쒸에(상하이·28세)씨는 카트 가득 아몬드 스낵을 담았다. 매대를 가득 채웠던 아몬드가 금방 사라졌다. 롯데마트 점원은 “바로바로 물량을 채워도 외국인에게 인기가 좋아 자주 동난다”고 했다. 중소기업이 만든 아몬드 과자가 중국인에게 인기다. 오랜 시간 주요 수출품이었던 초코파이·신라면보다 많이 사 간다. 롯데마트는 '2017·2018년 롯데마트 중국인 방문객의 상위 10개 구매 품목'을 5월13일 발표했다. 작년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1위를 기록한 제품은 ‘허니버터 아몬드 피크닉 세트’다. 허니버터·와사비맛·요구르트맛 등 다양한 맛의 아몬드 과자를 세트로 묶은 제품이다.
허니버터 아몬드 시리즈를 만든 회사는 길림양행이다. 1982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 견과류 전문 업체다. 당시 해운회사에서 영업 상무를 맡고 있던 윤태원 회장이 무역회사 길상사를 인수하면서 탄생했다. 초기엔 주로 견과류를 수입해 팔았다. 지금은 그의 아들 윤문현(41) 대표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회사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6년 회사 대출 빚만 100억원 정도였죠. 목욕탕 의자와 고무 대야를 놓고 비닐팩에 포장하는 식이었습니다. 사업을 물려받지 않고 대기업 정유회사에서 일하려 했죠. 가망 없는 회사라 여겼어요. 2000년대 초반은 전반적인 국내 제조업체들이 기울기 시작한 때입니다. 길림양행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견과류를 사와 국내에 유통하는 사업구조로만 수익을 냈어요. 하지만 세 번이나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앞에 두고 회사를 팔겠다고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운명이라 생각하고 빚만 갚자 생각해 대표직을 맡았습니다.”
당시 길림양행은 롯데·오리온·해태 등 대형 제과 업체에 견과류를 납품하면서 발생하는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연 매출은 400억원대였지만 영업이익은 5억원 미만이었다. 부채가 많아 이자를 갚기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원료(견과류)를 납품하는 하청업체는 대기업에게 견과류 원가를 모두 공개한다. 대기업이 책정한 마진율(약 2%)보다 수익을 더 내지 못했다. 새로운 제품개발이나 설비투자를 할 수 여력이 없었다. 이마저 견과류 유통 채널이 많아지면서 기업과 농부들 간의 직거래가 증가했다. 길림양행 같은 중간 유통업자들의 입지는 점점 줄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대출 회수가 들어오던 2010년, 이마트 측에서 PB상품(Private Brand·유통업체가 제조업체에 제품 생산을 위탁해 유통 업체 브랜드로 내놓는 것)을 만들자 제안했습니다. 아몬드·호두 등 견과류를 구워 포장하는 일입니다. 이마트 측과 200억원 가량의 계약을 체결했어요. 망하기 직전 극적으로 경기도 광주 공장을 가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유통 업체가 거래처를 바꿀지 몰라 불안했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길림양행만의 제품을 만들어야 수익이 난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든 제품이 바로 아몬드에 허니버터·와사비·쿠키앤크림 맛을 더해 과자처럼 먹는 아몬드 간식이다. 그가 참고한 제품은 2014년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해태제과의 허니버터칩. 버터와 꿀을 이용한 해태제과의 감자칩은 큰 인기를 몰아 전국 편의점에서 품귀현상을 빚었다. 중고거래·웃돈거래 등도 성행했다. 허니버터칩을 구할 수 없었던 GS25 측이 먼저 윤 대표에게 제안했다. “길림양행에는 허니버터칩 같은 과자 없냐는 말을 들었죠. 아몬드에 과자 양념을 입히면 비슷한 맛이 나지 않겠냐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친구가 운영하는 작은 쿠키 공방을 찾아가 제품 개발을 했어요.”
“회사에는 제대로 갖춰진 조리실이나 제품 연구실이 없었어요. 혼자 작업실에 들어가 아몬드를 기름에 튀기고 구워보면서 레시피를 개발했습니다. 사실 GS25가 제안하기 전부터 여러 아몬드 조리법을 시도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겉면에 설탕을 코팅해도 아몬드끼리 달라붙지 않는 비법은 길림양행만의 노하우입니다. 2010년부터 제품 개발을 해왔기 때문에 허니버터 아몬드를 신속하게 출시할 수 있었죠.”
2015년 1월, 허니버터 아몬드의 첫 매출은 1억원이었다. 2월은 8억원, 3개월 차엔 1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당시 회사 직원은 40명가량이 있었다. 자동설비를 갖추지 못해 전부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공장을 24시간 풀가동하고 직원을 늘려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었다. “제품을 만들고 약 2년간은 유통회사에 사과하러 다닌 기억뿐입니다. 계약해놓고 생산물량을 맞추지 못했으니까요.”
제품 출시 후 길림양행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허니버터 아몬드를 출시하기 전 2014년 매출은 649억500만원(영업이익 11억3100만원)이다. 2015년 매출 980억원, 영업이익 70억원을 기록했다. 2016년 매출 1150억원, 영업이익 180억원을 냈다. 2년만에 영업이익이 약 16배 증가한 셈이다. 2017년 이후에는 연 매출이 1300억원이 넘는다. 경기도 광주 물류센터도 약 1만5000m² 규모로 증설했다. 현재 300명 정도의 직원(정규직 165명)이 일하고 있다. ‘허니버터 열풍’의 조상 격인 해태의 허니버터칩은 인기가 사그라든지 오래다. 그런데도 허니버터 아몬드 매출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허니버터 맛 후속 제품인 쿠키앤크림·티라미수·별빛팡팡 등도 인기다. 관광객 밀집 지역(명동·서울역·공항 등)에서 전체 매출의 70%가 난다.
“중국에 입소문이 난 덕분입니다. 매출 손실을 감안하고 정식 검역 통관 절차를 밟아 제품을 유통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유통 업체 한곳과 계약해 안정적인 제품 유통망을 가질 수 있었죠. 보따리상(따이공)이라 불리는 개인 유통업자들과는 거래하지 않았어요. 이들을 통하면 쉽게 많은 매출을 낼 수 있지만 거래량이 일정치 않은 데다 중국 내에 어디 유통하는지 파악하기 어렵죠. 하도 가짜가 판을 치다 보니 중국 소비자들은 ‘진품 찾기’에 오히려 혈안이에요. ‘중국의 스타벅스’라는 루이씽(瑞幸·Luckin) 커피전문점 매대에 입점하는데도 성공했습니다. 구하기 힘들지만 믿고 먹을 수 있다는 브랜드 인지도를 키운 거죠.”
“과자가 아닌 아몬드로 브랜드를 알리는데 힘썼습니다. 브랜드 마케팅에는 저희 직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인재도 적극적으로 영입했죠. 2016년 초 합류한 백순흠(41) 개발팀장은 중소기업에서 보기 드문 이력을 갖고 있어요.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졸업해 글로벌 패션 기업인 제냐 등 미국 본사 등에서 MD로 활동했죠. 라디오베이·보버라운지·플로이 등 유명 레스토랑 브랜드 개발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적인 견과류 회사로 키워보자는 제 말을 믿고 함께 했습니다. 길림양행은 기계 설비·제품개발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투자하는 곳입니다.”
윤 대표는 “40년 역사를 지닌 오래된 회사가 트렌드를 앞서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함께한 직원들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회사를 잘 이끌기 위해선 직원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회사가 안정화되면서 그간 고생했던 각 부서의 팀장들(9명)에게 차(BMW 3시리즈) 한 대씩 선물해줬어요. 제가 10년 전부터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 꼭 보답하겠다’ 약속했거든요. 그때는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직원들이 먼저 이렇게 말해요. ‘대표님이 하신 말씀대로 다 됐다’고요."
길림양행은 직원 만족도가 높은 회사다. 주 52시간 근무제에 전 직원이 5시에 퇴근한다. 윤 대표는 “우리 회사는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회사”라고 말한다. 회식이 없는 조직문화를 만든 데다 접대로 영업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다. 윤 대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누가 회사에 있을까 싶다”라고 설명했다.
길림양행이 수입하는 견과류는 40여 가지. 연 취급 원물량(견과류)은 약 1만4000톤이다. 그중 아몬드는 9000톤에 달한다. 2019년 5월 기준 길림양행은 16개국에 진출했다. 중국·홍콩·일본·싱가폴·태국·베트남·아랍에미리트를 비롯해 미국·캐나다·호주 등이다. 전 매출의 20%는 수출에서 난다.
“올해 9월 명동 한복판에 플래그십 스토어가 생깁니다. 중구 충무로 2가 65-9번지. 명동역 유니클로 건물 지하 1층(반지하)에 길림양행 스토어를 낼 예정입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에 제품을 알릴 좋은 기회죠. 앞으로 길림양행은 중소 제조업체의 한계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신화를 쓸 겁니다.”
글 jobsN 김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