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신장암 판정···. 병실에 누워 매일 필드 복귀 꿈꿨던 골프선수
이민영 한화큐셀 프로골퍼
어려운 가정환경 극복하고 성공적 데뷔
데뷔 후 3년만에 신장암 판정
“다시 필드에 설 수 있어 운이 좋은 사람”
“스물셋, 신장암 판정을 받았다.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아팠다. 소변이 나오지 않는 등 증세가 심각했다. 2015년 3월 중국 하이난성에서 열린 유럽 여자프로골프투어(LET)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 대회에 나갔을 때였다. 한국에 돌아와 2차례 검사를 했다. 수술을 받고 2개월 지난 뒤 다시 필드에 나갔다. 다시 돌아올 수 있어서 운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화큐셀 이민영(27) 프로골퍼는 ‘인간 승리’를 보여주는 선수다. 2011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 데뷔, 2015년까지 총 4승을 거뒀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중국에서 대회를 치르던 도중 복통을 느꼈다.
“신장암 검사를 받을 때 골프를 그만둘 수 없다고 의사 선생님께 울며 매달렸다. 초기 단계에서 발견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선 나이가 어린 암 환자일수록 위험하다고 했다. 노년층에 비해 암세포 증식이 빨리 일어난다고 했다. 수술을 하면 절대 안정이 필요해 3개월 정도 골프를 칠 수 없다고도 했다. 평생 선수 생활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입원실에 누워있으면서 하루 종일 필드에 나가는 상상을 했다. 골프 필드 위 풀 밟는 감촉을 머릿속에 간절히 그리고 또 그렸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 2개월 만에 대회에 나갔다. 주위에선 안정이 필요하다며 말렸지만 아무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복귀 14개월 후 중국 산둥성에서 열린 금호타이어 여자오픈(총상금 5억원) KLPGA 대회에서 우승했다. 2017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에 진출했다. 일본 투어 진출 5경기만에 첫승을 올리는 등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올해 5월에는 호켄노 마도구치 레이디스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우에다 모모코(일본)와 신지애(31) 선수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서 상금 2160만엔(약 2억3000만원)을 받았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골프선수로 데뷔하기까지, 데뷔 후 암을 이겨내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까지. 이민영 선수의 드라마는 끝이 없다.
◇방학 때 집에만 있었던 초등학생, TV 속 필드 보고 “골프 시켜달라”
선수의 꿈을 꾼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부모님은 맞벌이로 늘 바빴다. 경기도 부천에서 어머니는 화장품 가게를 했고 아버지는 정육점에서 일했다. 여름 방학이 끝난 개학식 날. 학교 친구들은 방학 동안 가족과 여행 간 이야기를 늘어놨다. 이민영 선수는 할 말이 없었다. 아무 곳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홀로 텔레비전을 봤다. 골프 중계방송이 나왔다. 골프채를 들고 푸른 필드를 누비는 선수의 모습을 봤다. 골프선수를 하면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부터 아빠에게 골프를 시켜달라 졸랐다. 부모님은 골프를 한번도 안 쳐보셨다. 일단 아이가 하고 싶다 하니 동네 스포츠센터에 있는 지하 실내 골프 연습장에 데려가 주셨다. 부모님께선 경제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센터는 그리 비싼 편도 아니고 기본을 배워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처음엔 오빠도 같이 배웠다. 오빠는 3개월도 못 배우고 지하실이 답답하다며 도망갔다. 난 그 길로 골프선수가 됐다.”
골프를 배우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이민영 선수의 초등학교 1·2학년 생활기록부에는 ‘주의가 산만해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끼침’이라고 쓰여있다. 그러나 골프를 배우면서 끈기를 기르고 침착하게 마인드 컨트롤할 수 있는 방법을 익혔다. 약 8개월 뒤 스포츠센터 지하 골프 연습장을 벗어났다. 본격적으로 훈련하기 위해 부평역 근방에 있는 대형 골프연습장을 찾았다. 집에서 지하철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매일 골프가방을 메고 지하철을 탔다. 옆에서 경쟁하는 친구들은 부모님이 차로 연습장을 데려다주고 식단까지 챙겨줬다. 이민영 선수의 부모님은 생업에 바빠 그럴 여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더 칼을 갈았다.
◇”넉넉지 않았던 가정 형편, 더 절박하게 만들었다”
“골프장에 새벽부터 나가 밤늦게까지 머물며 고민은 오직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밥값을 아낄 수 있을까.’ 부모님께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난 눈치채고 있었다. 골프선수를 하려면 일 년에 1억원 정도 든다는 말을 들었다. 쉽지 않겠다 생각했다. 골프로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절박했다. 오전 7시에 연습장에 나가 밤늦게까지 무식하게 훈련했다. 골프 중계 영상을 보면서 무작정 따라 하는 식이었다. 주위에 조언해주는 사람이 없어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내 기술의 문제점과 단점이 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주니어 시절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대기만성 스타일”라고 평가한다. 2011년 프로골퍼로 데뷔한 뒤 하반기 경기를 한달 앞두고 스윙 스타일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새로운 코치를 만나 스윙법을 처음부터 익혔다. 민혜식 코치는 그에게 “아무 기술을 부릴 줄 모르고 기본기만 할 줄 안다”고 했다. 하반기 대회 출전까지 한달여 시간이 남아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에라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2011년 대회 영상을 잘 보면 상반기와 하반기 플레이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 데뷔 첫해 준우승 2회를 기록했고 2012년에는 8회의 톱10, 2013년 1승, 2014년 2승을 거뒀다. 해마다 성적이 오른 것이다. 부모님께서 도와주셨던 날들을 부끄럽지 않게 추억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신장암 투병하고도 끝까지 도전 “할머니 나이에도 골프 선수로 일할 것”
2015년 신장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투병 이후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골프를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아프기 전까진 그는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타입이었다. 성적에 집착해 매일 기분이 널뛰었다. 다시 투어에 복귀하면서 다짐한 것은 딱 하나. ‘언제나 감사하기’였다.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최고의 선수들이 있는 미국 LPGA에 진출하기 위해 아등바등했을 것 같다. 아프길 잘했다. 냉정하게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는 계기였다. 미국 진출 대신 코치님께선 일본을 추천해줬다. 코스가 좁은 데다 산악지형이라 플레잉 스타일에 잘 맞을 거라고 말해줬다. 정확한 예측이었다. 2017년 JLPGA 데뷔한 해 성적 랭킹 2위를 기록했다.”
올해는 일본에 진출한지 3년째 되는 해다. 지난 5월 그는 호켄노마도구치 레이디스(총상금 1억2000만엔·13억550만원)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현 후쿠오카CC(파72·6292야드)에서 최종합계 10언더파 206타를 기록했다. 2위 그룹을 1타 차로 밀어내고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9언더파를 친 신지애와 우에다 모모코(일본)가 공동 2위였다.
최근 사만다타바사레이디스토너먼트(상금 6000만엔·6억7000만원)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2위. 7월21일 열린 일본 이바라키현 이글포인트 골프클럽(파72 6601야드) 대회 파이널 라운드에서 버디 5개에 보기 1개로 68타를 쳤다. 종합성적은 한 타차 2위(16언더파 200타)다.
“스폰서 기업인 한화큐셀이 잘 도와준 덕분에 일본에 적응할 수 있었다. 올해 아직 17~18개 경기가 남았다. 골프는 자유로운 운동이다. 매일 경기장이 바뀌니까.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 골프선수를 꿈꿨던 나로서는 항상 감사하다. 주변에서 아무리 말려도 더 열심히, 계속 열심히 할 거다. 많이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 겨울에 신장암 생존율(암세포 생존 비율)을 검사할 계획이다. 5년 동안 암이 재발하지 않았다면 의학적으로 완치라고 한다. 다 나았을 것이다. 고기도 끊고 저염식으로 식단 관리를 열심히 했으니까. 살다 보면 자꾸 어려운 일들이 생기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보고 많은 분들이 힘을 낼 수 있다면 좋겠다.”
글 jobsN 김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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