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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Apr 02. 2024

샘! 어떻게 사는 법이 있는 건가요?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통해서 삶의 지혜 발견하기

길이 있는 건가? 

지금은 시골에 내려와 사니 지하철을 탈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학생 시절에는 지하철역 주변에서 '길'을 묻는 분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도를 아십니까?"


검색을 해보니, 요즘은 "도를 믿으십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듯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을 '도믿걸', '도믿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도'라는 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이름의 깊이와는 다르게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본래 의미에 대해 한번쯤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은 어딘가를 향해 있습니다. 어딘가로 가려면 가장 먼저 길을 찾아야 하고, 길을 찾았다면 그 길이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 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공부하는 법을 알아야 원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법을 모르면 아무리 시간을 많이 투자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공부에도 길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법도 중요합니다. 관계하는 법을 알아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관계에도 길이 있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조리하는 법도 있고, 운동을 잘하는 법도 있으며, 낚시를 잘하는 법도 있는데 예전에 루어 낚시를 좋아하는 친구가 물고기 종류마다 다른 루어를 사용하고, 손의 스냅을 줘야 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낚시의 세계는 깊고도 넓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그것을 하는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살아가는 법이 있고, 그 길을 따라야 바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 추론이 아닐까요?
다만, 앞서 설명한 그런 것들보다 삶은 좀 더 복잡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그 목표가 달라서 마치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달라야 할 것처럼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사람마다 삶의 가치가 다르기에 살아가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경쟁과 성취가 중요한 사람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 있고, 소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시골에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있고, 도시에 사는 사람의 그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고, 어디에 살던지 모두가 사람이기에 동일하게 살아가야 하는 모양새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의 길'이라고 불러보면 어떨까요? 


영화 '포레스트 검프'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94년 영화입니다.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 시각효과상을 받아 총 6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습니다. 영화사적으로도 위대한 작품이지만, 철학적으로도 깊이 생각해 볼 지점이 많은 참 좋은 영화입니다. 


포레스트 검프_오늘을 살다

포레스트 검프는 다리가 불편하고, 지능이 낮은 초등학교 남자아이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집을 떠났고, 홀로 남은 엄마와 함께 사는 포레스트 검프에게 삶은 거칠고, 만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쉽게도 신께서 그에게 주신 능력은 거의 없는 듯 보입니다. 공부를 할 수 있는 머리도, 멋진 외모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눈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약점을 가진 자들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잔인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레스는 검프는 그런 세상의 희생양이었습니다. 그는 학교 폭력과 따돌림의 대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신께서 주신 선물이 있었는데, 바로 친구 '제니'와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검프는 단 하나뿐인 그의 능력 '달리기'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는 자신을 못살게 구는 악당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달렸습니다. 미식축구 선수가 되어 팀을 위해서 달렸습니다. 군인이 되어 살기 위해서 달렸고,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달렸습니다. 그에게는 먼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어려웠기에 그저 오늘 하루에 집중하면 살았습니다. 


검프는 우연한 기회에 탁구를 하게 됩니다. 현재에 집중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검프는 '하루도 길다! 한 순간을 위해서 살겠다!'라고 선언한 듯 탁구공의 움직임에 모든 것을 집중합니다. 


니코스 카찬차키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나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래도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만 생각한다. 오늘만이 나의 것이다."

조르바는 과거의 후회, 미래의 두려움에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고, 오늘 하루 주어진 삶에 집중하며 즐거움으로 충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포레스트는 이런 심오한 철학적 이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 보입니다. 다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작기 때문에, 그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하나의 '길'이 보이는 듯합니다. 


성경에서도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생각과 마음이 묶여 사는 우리에게 포레스트는 '삶이란, 오늘 하루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제니_가득 참이 아니라 짜릿함을 찾다

포레스트가 사랑하는 여인이자, 친구인 제니 역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영화는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충격으로 제니는 방황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존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그냥 알고 있습니다. 이 존엄성은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험적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존엄을 빼앗아 굴복시키려는 시도로 가득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존엄을 빼앗긴 인간은 조정하기가 쉽고,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한 사람의 존엄을 확인시켜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의 눈을 통해 자신의 존엄성에 확신을 갖게 됩니다. 자식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으로 보면, 아이는 자신을 버리고 부모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려고 합니다. 자녀에게 사랑이 눈빛을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자기가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존엄이 깨진 아이는 자신의 존엄을 확인하기 위해, 사랑을 구걸하는 자로 변해갑니다. 

안타깝게도 사랑을 구걸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먹잇감이 됩니다. 참 사랑과 애정이 아닌 유사 사랑과 애정에 속고, 그것에 조정되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 속에서 제니는 전형적인 '사랑 구걸자'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녀는 참 사랑을 구분하는 능력이 없기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포레스트를 거부하며 더 자극적이고, 강력한 경험을 추구합니다. 


결핍된 사랑을 채우고자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가수가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스트립바의 가수로 살아갑니다. 그녀는 세상의 중심에 서고자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정의로운 자'로 만족감을 채우려 '히피 운동' 대열에 합류하지만, 실상은 무분별한 성관계, 마약, 술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포레스트를 떠올립니다. 마치 성경의 '탕자의 귀향'처럼 인생의 위기의 순간, 자신이 좇던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포레스트에게서 안식을 누립니다. 회복하고, 일상을 살아갑니다. 


제니의 길은 자신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먹지 못할 것을 위하여 자신의 시간을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포레스트는 작지만,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했고, 그 사랑 위에서 사랑을 구걸하지 않는 내면에 따뜻한 꺼지지 않는 난로를 가지고 살았기에 속지 않았고,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제니의 길을 통해 우리는 부모의 길이 있다는 것과, 사랑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댄 중위_후회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포레스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포레스트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 바로 중대장 댄 중위입니다. 그는 대대로 군인 집안으로 조상들이 위로 3대까지 전장에서 돌아가셨으며 그 역시도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진짜 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베트콩의 매복 작전에 휘말려 들어 중대원들을 거의 잃어버리고, 포레스트의 도움으로 겨우 전장에서 목숨을 건진 댄 중위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포레스트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을 평생 불구로 수치스럽게 살게 만들었다며 강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댄 중위는 휠체어를 탄 채 술을 마시고, 후회와 증오로 삶을 낭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레스트가 무공훈장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TV로 알게 되었는데, 댄 중위는 포레스트를 찾아가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너 때문이라며, 너 같은 얼간이가 무공훈장이 말이 되냐'라고 따졌습니다. 

포레스트는 무례한 댄 중위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는 댄 중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를 진정한 친구로 대해주었습니다. 


이런 포레스트의 태도에 댄 중위도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후회만 하며 살던 그가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돌이키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댄 중위의 눈에 포레스트 검프는 '바보'였습니다. 모자라고, 관계지능도 낮은 그가 어떠한 것도 후회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포레스트가 배를 사서 자신의 절친 '버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우잡이를 시작할 것이라고 처음 이야기를 했을 때, 댄 중위는 그것은 꿈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포레스트 검프는 '바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보가 어떻게 배를 사서, 새우잡이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포레스트가 선장이 되었을 때, 댄 중위는 과거를 후회하며 오늘을 망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오히려 더 '바보'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댄 중위는 포레스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새우잡이 배에 탑니다. 그리고 그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마치 과거를 벗어던지는 듯한 자유로운 수영을 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댄 중위가 선택한 후회의 길은 우리를 참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기에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삶에서 진정으로 후회에 남는 일이 있다면, 당사자에게는 사과와 배상을 신에게는 회개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후회의 길이 아니라, 오늘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길이 바른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길

살아가는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찾고, 그 길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길 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그 대가는 삶을 통해 치러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길에 대해서 고민한 사람입니다. 많은 소피스트들이 이익과 대중이 인기를 좇으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인생이 알려주는 '바른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바른 길이 아니라, 이익이 되는 길, 즐거운 길, 인기를 얻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며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들이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바른 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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