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 예술가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의 예술가
chat gpt 개발사인 open AI가 영국의 글로벌 회계법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와 기업용 버전인 챗GPT 엔터프라이즈 사용 및 재판매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습니다. PwC가 chat gpt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하던 많은 일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하라리는 'AI가 대체하기 쉬운 직업으로' data 분석만 하는 직업을 꼽았는데, 의미인 즉, 머리를 쓰는 직업이 몸을 쓰는 직업보다 대체가 더 쉽다는 것입니다.
얼마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은 주어진 정신력(뇌)의 일부만을 사용하고, 반면에 육체적인 능력은 그보다 더 많이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AI가 인간의 정신력을 먼저 넘어선 후에, 로봇이 인간의 육체 능력을 넘어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앎은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감각은 변화하고 흐르는 세상의 표상만을 제공할 뿐이지만, 이성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파이드로스』 247c-d)
"행복은 쾌락이나 만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삶에서 온다. 이성은 영혼의 다른 부분들을 지배하고, 욕망을 조절하며, 이데아의 세계를 향해 영혼을 이끌어 올려줌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파이드로스』 250a-b)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래로 '이성'은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며, 영혼의 특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신다는 점을 여러 곳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하는 능력'이란 인간 고유의 것, 또는 신으로부터 지음 받은 인간의 특징으로 여기며 특별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기능이며 기술적으로 구현가능한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고등학생 딸이 '이명' 증상이 있어서, 의사 선생님과 통화를 했는데, 그 선생님 말씀이 "이명이라는 것이 달팽이 관에서 뇌로 연결되는 전기신호의 오류 때문에 발생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실제로 있는 소리를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들린다고 오작동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귀와 뇌가 '전기'로 신호를 주고받는다면, CPU의 각 기능들 간에 이루어지는 전기적 소통과 무엇이 다른 걸까?
그렇다면 전기신호를 뇌에 주는 것만으로도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카이스트의 김대식 교수는 이를 '강한 인공지능'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인간의 사고가 하나의 '기능'일뿐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독보적인 인간 본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얼마 멀지 않은 미래에 AI가 인간과 같은 사고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엔비디아의 젠슨황 CEO에 따르면 현재 100조 개의 파라미터를 지원하는 GPU가 개발됐는데, 이는 인간의 시냅스의 1/10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AI가 예술가까지 대체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예술이야말로, 창조력의 결정체이고, 창조력이야말로 오랫동안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유발하라리는 '창조력'도 결국은 인간 경험의 창의적인 재구성이며, 그렇다면 AI도 창조력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AI가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얼마 전 Open AI에서 'Sora'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AI가 동영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며, Suno라는 AI 작곡 프로그램으로 작곡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도 새로운 곡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든 노래가 지자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최소한 AI가 예술가의 어떤 부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질문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다양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때로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꿈과 비전을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고, 때로는 한 개인의 순수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예술적 기능과 역할이 존재하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한 인간'의 삶과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예술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웅장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려낸 미술가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은 그림 자체로 상업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업적 가치로 말하면, 한 상업 디자이너가 그린 그림도 상업적 가치가 있습니다.
두 그림 모두 상업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을 AI는 대체할 수 없고, 상업적 목적으로 그린 그림은 당연히 대체를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대체가 불가하고, 후자는 대체가 가능한 이유는 전자는 비싼 그림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더 명확할 것입니다.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제가 맡고 있는 목장 아이들이 저에게 전지 사이즈의 종이에 제 얼굴을 그린 후 롤페를 써줍니다. 이 그림은 사실 현재로서는 상업적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100년 후 저의 후손들은 어쩌면 이 그림을 돈을 주고 살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AI는 이 그림을 동일하게 그려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그림입니다. 저의 목장 아이들이 직접 손으로 그린 그림에는 그 아이들과 제가 함께 한 시간이 있고, 아이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형태만 같다고 해서 같은 그림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대체가 불가합니다.
반면,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은 상업디자이너의 그림은 언제라도 대체가 되고, 폐기될 수 있습니다. 의미가 없었기에 폐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업디자이너의 친구들이 그녀의 수고를 기리기 위해서 그의 작품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다시 이 그림들은 '대체불가'한 그림이 됩니다. 왜냐하면 상업디자이너의 그림에 '의미'가 부여 됐기 때문입니다.
대체할 수 있는 예술은 이야기가 없는 예술이고, 대체할 수 없는 예술은 이야기가 없는 예술입니다.
앞으로 상업적 목적의 예술영역은 점점 더 AI에 의해서 대체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태초부터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던 인간의 본성이 사라질 리 없습니다. 상업적이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의 그림은 더욱더 진솔한 이야기와 삶과 밀착된 고유한 목소리로 지속될 것입니다.
AI가 예술을 대체할 것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상업적 관점'에서 예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붙이는 것을 AI가 할 필요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림은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기에 내가 하지 AI가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모든 예술은 그 작품이 나오게 된 이야기와 의미가 함께 전달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은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앞으로 더욱 그럴 것입니다.
내가 왜 이 그림을 그리고,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발 더 나아가 이 그림이 나라는 인간과 보편적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철학은 더욱 중요해지고,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꼭 필요합니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면, 나의 모든 것들은 AI에 의해서 대체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