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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산 Feb 06. 2022

#9.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정문정 지음, 가나출판사>


      

  ‘그래 스물넷’ 인터넷 도서사이트에 들어가 구입했다. 표지 그림은 꽃을 보고 웃고 있는 여자 어른이 나온다. 자신을 꽃처럼 보라는 걸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이야기겠지. 작가는 대구 출생에 잡지 기자 생활을 하고, ‘대학내일’ 신문 칼럼을 꾸준히 쓰고 있는 분이었다. 여전히 꾸준히 쓴다는 것은 힘이 세다. 칼럼을 쓴다는 것은 어느 정도 세상을 보는 안목과 통찰이 있다는 뜻. 젊은 나이에 대단하다. 이것도 무례한 표현일까.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무례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알려준다. 많은 에세이 글을 통해,  글들은 어느 신문 칼럼으로 쌓인 것을 모아 책으로 만든  같다. 그래서 책이다. 글이 묶인 것이 책이다.  책을  동기는  정치인이 공항에서 펼쳐진 가방 노루 패스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노루 패스 영상을 나도 봤다. 정치인 이전에  재벌의 노루 패스도 봤다. 그것을 보고 언론에서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다라고 하니  정치인은 다음 5개월 정도 뒤에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재벌도 이제 자신의 비서에게 노루 패스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 갑질 논란으로  이상 그런 재벌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후  갑질은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게 공론화되고 잘못된 행동이라는 인식으로 많이 줄어들었으리라 믿는다. 이게  개소리에는, 개행동에는 단호하게 대처했던 이들이 있기에 가능했겠지. 그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겠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작가는 다양한 무례한 이들을 만났을 때 대처법과 대화법을 알려준다. 현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일지 모르지만 우선 여기에 적어둔다. 언젠가 누군가의 개소리, 개행동에 무의식적으로 나오겠지 생각하며, 역으로 내가 그 개소리를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 항상 조심하자. 요즘 분노가 많아진 나를 돌아보며.      

 “얼굴이 남자 같이 생겼어.” 그는 평소에도 속물적이거나 무례한 질문을 막 던짐으로써 출연자들을 당황케 하는 게 특기였다. 이럴 때 보통은 그냥 웃고 넘기거나 자신의 외모를 더 희화화하며 맞장구치는데, 김숙은 그러지 않았다. 말한 사람을 지그시 쳐다본 뒤 “어? 상처 주네?”하고 짧게 한마디 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 그러자 상대가 농담이라며 사과했고, 김숙도 미소 지으며 곧바로 “괜찮아요”하고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화되었다. p.6     

"남자는 조신해야죠”, “술은 남자가 따라야죠” 같은 반사 화법을 쓰는 것도 흥미로웠다.

“왜 이렇게 예민해? 생리 중이야?”라고 하자, “그럼 부장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오늘 몽정하셨어요?”하고 맞받아쳤다.

“남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기면 패가망신한다” 같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비틀기를 통해 사람들은 웃으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간 별생각 없이 듣고 써온 말이 얼마나 편견에 찌들고 폭력적인 것이었는가를.

“우리는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을 많이 만난다. 사람마다 관계마다 심리적 거리가 다르다는 점을 무시하고, 갑자기 선을 훅 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감정의 동요 없이 “금 밟으셨어요”하고 알려줄 방법은 없을까? 당연히 있다. p.10

"무례한 사람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사람은 역할에 따라 적절한 옷으로 갈아입는데, 어는 순간부터 ‘갑의 옷’을 벗는 걸 잊은 것이다. 회사에서 대표인 사람이 집에서나 친구를 만날 때조차 대표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나이가 들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면서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자신이 옳다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무례함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고, 풍선처럼 부푼 무례함으로 높이 떠오르자 모든 사람이 그의 발아래 있게 됐다. p.23     

"마음의 균형이 무너질 때 몸은 가끔 에러 메시지를 보내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때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몸을 찬찬히 이해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마음의 문제를 찾아 보듬어줄 때, 몸은 밸런스를 찾아나간다.” p.33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누가 자기에게 뭘 주고 갔어요. 선물인 줄 알고 열었는데 안을 보니 쓰레기예요. 그럼 질문자는 어떻게 하겠어요?” 질문자가 말했다.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겠죠. 스님이 이어 말했다.” 나쁜 말은 말의 쓰레기입니다.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고, 그중 쓰레기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쓰레기인 걸 깨달았을 때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탁 던져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그 쓰레기를 주워서 1년 동안 계속 가지고 다니며 그 쓰레기봉투를 자꾸 열어보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쓰레기를 줄 수 있어’ 하면서 그걸 움켜쥐고 있는 거죠. 그 사람은 그 쓰레기를 버리고 이미 가버렸잖아요. 질문자도 이제 그냥 버려버리세요.”

p.194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첫 번째는 문제가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이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그렇다 누군가 그 선을 넘었을 때 경고하는 것은 언어폭력에 대처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편견이 심한 말을 들었을 때, 흥분하지 않고 “제삼자가 듣는다면 오해하겠는데요?”라고 말하거나 “당사자가 들으면 상처받겠네요”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건조하게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 못 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되물으면 더욱 좋다. 예를 들어 누군가 농담이라며 “저 사람은 얼굴이 참 이타적이네”라고 한다면 “아, 저 사람이 못생겼다는 뜻이죠?”라고 되묻는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상대는 순간적으로 머쓱해하며 자신의 표현을 점검할 것이다.

 세 번째는 상대가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 들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영감탱이는 욕이 아니라 친근한 표현이라서 썼다”라고 한다면, “저도 친근하게 영감탱이라고 불러도 될까요?”하고 응수할 수 있다. 상대가 사용한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돌려줄 수도 있다. “가슴이 작은데 왜 브래지어를 해?” 하고 묻는 남자에게 “그럼 오빠는 왜 팬티 입어?”라고 할 수 있듯 이상한 논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역지사지를 경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는 무성의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육아 전문가들은 아이에게 여러 번 설명했음에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떼를 쓴다면 달래주지 말라고 조언한다.

 다섯 번째는 유머러스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말을 들을 때 특히 유효한테, 누군가 가부장적인 편견이 가득한 말을 할 때 “우와, 조선 시대에서 오셨나 봐요. 상평통보 보여주세요!”하고 받아치는 식이다. 애정은 없고 자기 자랑만 있는 잔소리를 들으면 “요즘은 잔소리하려면 선불 주고 해야 한다던데요?라고 하거나 ”저희 부모님도 30년 동안 노력하다 포기하셨는데 어떻게, 가능하시겠어요? 하고 농담하듯 받아치면 상대도 더는 말을 이어가기 힘들 것이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자꾸 참으면 내가 무기력해진다.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면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만의 대처법을 갖춰야 한다. “다들 괜찮다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떨어?”하는 사람에게 그 평안은 다른 사람들이 참거나 피하면서 생겨난 가짜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인류는 약자가 강자에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라고 함으로써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부당함을 더는 참지 않기로 하는 것,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이런 것이라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세상의 진보는 지금까지 그렇게 이루어져 왔다. p.222          

 7080 세대는 아니고 엑스세대인 난 공동체적인 삶과 개인주의 삶을 공존하며 산 세대 갔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앞세우기보다 내가 속한 조직과 집단을 위해 자신을 조금 희생해야지 조직이 평화로워진다고 배웠고, 한편으론 그래도 자신의 편안함과 사생활도 중요하지라는 인식이 공존하는 세대를 살았다. 그래서 갈지자처럼 갈팡질팡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조직의 평온이라는 잣대로, 또 다른 한편으로 내 안위를 생각하는 잣대로 그 기준이 왔다 갔다 하는 소시민의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이제는  조금 거창하지만 이 사회가 조금 나아진 모습으로 성장하기 위해 위에 표현된 그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표현해 봐야겠다.  쉽지 는 않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겠지. 연습해보자. “당신 지금 금 밟으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김숙처럼 ‘어 상처 주네’라고. 나 역시 누군가의 금을 밟지 않으면서. 또한 내가 못하는 걸 용기 있게 행동하는 이들을 욕하지는 말자. 왜 그리 유난스럽게 말하지라고 딴지는 놓지 말자. 그들은 세상의 진보를 위해 큰 용기를 내 한 걸음 나아가는 자들이다. 무례한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대처하는 도인들이다.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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