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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산 Jul 05. 2024

삶과 가까워지는 교육

삶을 위한 국어교육/이계삼/녹색평론 

최근 드라마 <졸업.>에 나온 표상섭 선생님이라는 인물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20년 가까운 국어교사로 공교육에 몸 담은 표상섭(김송일)이 교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사설학원 부원장으로 들어간다. 학원이 추구하는 좋은 대학 많이 가기라는 일방적인 목표가 아닌 국어수업 철학대로 문학이 무엇인지, 문예사조를 왜 배워야 하는지. 무조건 외우는 방식이 아닌 문학이 학생들의 삶과 가까이 다가가길 바라는 진심을 담아 수업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학원 일타강사처럼 연 극하듯 하는 그 약간 어색한 듯 과장된 동작, 잘 부르지는 않지만 끝까지 하는 동요 부르기,  정확한 발음을 한다라는 걸 꼭꼭 눌러 담는 듯 정확한 딕션, 칠판 판서의 활용, 학생들에게 툭툭 던지는 질문 하며 소통하는 모습까지, 그 배우의 연기는 일타강사가 무엇인지, 공교육의 내공을 담은 학원강사의 한 편의 멋진 공연이었다. 그 11분 분량의 영상을 보고 난 울컥했다. 과거 사범대학 국어교육을 전공하고 중등국어교사를 꿈꿔왔던 시절이 떠올랐고, 다시 자신만의 수업으로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꿈을 꾸고 미래를 준비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달래 먹고 맴맴 할 때 그 달래가 나물 달래가 아니고 원래는 담배였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당시 아동학대 아니 아동방치가 얼마나 심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1980년대 농촌에서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들 탓에 동네친구들 유년시절을 겪은 나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진짜 일타 강사 이지영은 이렇게 찬사를 남겼다고 한다. 

"오랫동안 강의해 온 대치동 강사입니다. 표상섭 역을 하신 배우 분이 진정한 일타강사 수업 기법을 그대로 쓰시네요. 엉뚱하고 의하게 만드는 수업 도입부의 노래, 그 의뭉스러움을 깨게 만드는 반전의 질문, 허를 찌르는 통념의 반박, 그 도입부 이후로 모든 수강생의 집중력을 멱살 잡고 끌고 가면서 수업의 모든 과정을 납득시키고, 왜 이런 수업을 하는지 이해시키고, 어려운 내용을 배우는 것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하고 모든 말투와 대화가 전부 몰입하게 만들고 설득력을 가지게 하는 발성, 표정, 호흡, 모든 것이 정말 감탄스럽습니다. 입시 경쟁 속에서 본질부터 설명하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데, 그 모든 것을 만족시킨 강의이고, 18년을 강의해 온 저도 감탄스럽게 만드는 연기입니다. 작가분도 대단하고 배우님도 정말 멋지시네요. 아침부터 더 열심히 수업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멋진 수업이었습니다. 문학작품을 오랜만에 읽고 싶게 만드는 영상이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나도 이 영상을 보았을 때 이런 수업을 하고 싶다와 함께 이런 강의를 들었다면 문학을 더 가까이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강사는 이 수업을 위해 수많은 자료와 연습을 했음을 짐작하고 배우는 일타강사 자료를 얼마나 많이 찾고 분석하고 손짓, 몸짓, 목소리 하나하나 정교하게 다듬었을지 그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위 드라마 인물 표상섭과 수업의 본질은 결이 동일했을, 삶을 위한 국어수업을 실천해 온  국어선생님이 이계삼 선생님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삶과 동떨어진 암기식 주입식이 아닌 자신의 삶과 연결되길 희망하면서 지금을 부정하려 들면 어디서도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있다. 지금에 나를 돌아보며 <삶을 위한 국어수업>을 이야기해 본다. 꼭 국어수업만이 아닌 모든 수업, 인생수업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책은 당시 밀양 밀성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지은이가 전국국어교사모임의 회지인 [함께 여는 국어교육]과 월간 [우리 교육] 등 교육 관련 매체에 자신의 교육론과 국어 수업 사례를 정리하여 발표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아이들을 향한 모든 교육적 노력은 오직 ‘아이들의 삶과 그들의 세상’을 위해 쏟아부어야 한다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을 읽게 될 교사와 독자들이 우리를 무력하게 하는 입시와 경쟁의 굴레, 타인의 시선과 평판, 자습서와 문제집 따위의 온갖 허위들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오로지 ‘아이들의 삶’만을 푯대 삼아 우리의 말글살이를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다 저자는 교육 불가능을 말하며 교직을 그만두고 마을교육공동체를 꿈꾸며 마을로 들어가셨다. 그 이후 삶이 궁금해진다. 


책 속에서 작가가 말한 아이들과 함께하며 건져 올린 소중한 삶을 나타내는 글이다. 
“아이들과의 우정이 내 삶을 지탱해 주는 힘”
“아이들과 함께 음식을 펼쳐놓고 먹을 때가 제일 좋고, 크게 웃으며 즐겁게 수업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거기서 얻은 힘으로 교원단체 활동을 하며, 가끔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경남 밀양에 있는 밀성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계삼 선생님이 어느 잡지에 실은 자신의 약력이다. 그는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학교에서 아이들과 싱그러운 우정을 나누는 데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도구’로 꼽은 세 가지인 도서관, 자전거, 시를 모두 갖추고 살아가는 기적 같은 행운을 누리고 있음에 늘 감사한다.
이런 소박한 지방 소도시 생활의 이면에서 그는 예리하고 저돌적인 예봉을 휘두른다. 지난 3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자퇴 선언 대자보를 내건 대학생 김예슬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얼마 후 어김없이, [한겨레] 칼럼 ‘세상 읽기’에 기고한 [김예슬 씨의 글을 읽으며]라는 그의 글을 볼 수 있었다.
“초·중·고 12년을 대학 하나만 바라보고 내리닫게 채찍질을 했다. 그렇게 진입한 ‘약속의 땅’이었건만, 그들을 정신적 백치가 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굴레 속으로 다시 밀어 넣는다. 그렇게 4년을 내달리게 하고서도 끝내 그들을 청년실업자로, 비정규직으로, 신용불량자로, 나이 서른이 다 되어도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른아이’로 빚어내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재 양성 과정’이 아닌가.”
그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지적 공간이라고 여기는 [녹색평론]에 기고할 르포를 쓰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기도 했고, 교원단체 활동가로 꾸준히 일해 왔으며, 오늘도 4대 강 사업 반대운동을 위해 작은 힘 하나를 보태고 있다.
아이들과의 행복하고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한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런저런 문제와 늘 씨름하는 그가 그동안 전국국어교사모임의 회지인 [함께 여는 국어교육]과 월간 [우리 교육] 등 교육 관련 매체에 발표한 자신만의 교육론과 국어 수업 사례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는 입시로 분절되고 지식으로 토막 난 우리의 말글살이를 ‘삶’이라는 피륙으로 보듬어 싸안는 수업을 꿈꾸게 되었고, 이를 실천에 옮겨왔다. 교사 경력이 쌓여가면서 그는 이런 수업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삶을 위한 국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책 제목 그대로 아이들을 향한 모든 교육적 노력은 오직 아이들의 삶과 그들의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데 쏟아부어야 한다는 믿음을 직접 보여주고 있다.




고전 작품과 아이들 사이에는 실로 두터운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이기도 하고, 문화와 가치의 장벽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전 교육은 대개 이 장벽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노력들을 지켜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속에 뭔가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고전 작품을 왜 가르치는 것인가, 조금 썰렁하게는 “고전 작품을 배워서 어디에다 써먹을까?”라는 식의, 고전 작품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이다. 물론 고전 작품은 입시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하기 때문에 분명한 현실적인 쓸모가 있다. 그리고 고전 작품을 가르치는 것은 문화의 전수자로서 교사의 당연한 책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은 “아이들의 삶을 위해서”가 될 것이다.
(/ pp.31~32)

5년 전 어느 날, [한겨레 21]을 보다가 조남준 화백이 연재하던 [시사 SF] 코너에서 눈에 번쩍 들어오는 만화를 보았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서정적인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만평이었다. 그것을 인쇄해서 함께 감상하고 아이들에게 손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표현해보게 했다.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비롯한 수업이었는데, 특별한 체험이 되었다. 평소 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이들이 깜짝 놀랄 만큼 깊고 섬세한 서정을 그려내거나, 때로는 슬프고도 해맑은 마음의 결을 그려낸 것이다.
(/ pp.143~144)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혼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선 기존의 길을 끊고 헤매는 시간이 필요하다. 방황은 언제나 환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저곳에서 제 방식으로 분출하는 ‘세상의 꼴통들’을 사랑하고, 또한 존경한다. 얼마 되지 않아 닥쳐올 ‘미증유의 혼란’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는 이 침묵과 안정을 차라리 두려워해야 한다. 조금씩 전체주의가 준동하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 pp.283~384)

내가 보기에 오늘날 한국 교육 현장에서 가장 강력한 담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빈곤’,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대한 우리 교육 주체들의 대응은 거의 절망적이다. 우선 교원들 스스로가 계층화되어 있다. 교사들의 경우 그 험난한 경쟁에서 승리한 정규직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대개의 교사들은 그들 자신이 학창 시절 더없는 모범생들이었기 때문에 빈곤층 아이들이 흔히 내보이는 적대감, 무기력, 일탈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학부모들, 특히 교육 문제를 고민하는 중산층 이상의 ‘배운 부모’들은 제 자식의 진학과 입시 문제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저 아이들이 결국 비정규직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바로 지금 빈곤으로 삶 자체가 망가져 있는 아이들의 절망에 대해서는 거의 사색하지 않는다.
(/ p.314)       


이 책이 나온 지 15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교육현실은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본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일까 아니면 우정과 연대로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실천을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게 만든 책이다. <삶을 위한 국어수업> 지난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수많은 문학작품이 단지 암기용이 아니라 내 삶을 둘러볼 수 있던 계기가 되었다면, 이렇게 글쓰기를 어려워하지 않고 술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쓸 수 있는 작문시간이나 글쓰기 수업 시간이 있었다면 어때을까 생각해 본다. 이건 어쩌면 비겁한 변명이다. 삶을 위한 모든 수업을 만들어가는 건 자신이다. 주변을 탓하지는 말고 자산의 삶을 떠나지 말자. 더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자. 삶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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