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더워 죽겠네.”


아까부터 입만 벌렸다 하면 더워 죽겠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덥다. 발이 시멘트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기분이다. 늘 지나는 길이 너울너울 춤추는 부연 것으로 가득 찼다. 어느 만화에서 시간여행을 할 때 몸이 종잇장처럼 납작해져서 너울대며 가던데. 나는 지금 시간여행을 하는 것일까. 눈이 뱅글뱅글 돈다.


“저기요. 괜찮아요?”

“네, 네? 엄마야.”


뼈다귀 같은 손에 팔이 잡혀 꼴사납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비척비척 스텝을 밟다 겨우 중심을 잡았다. 뭐야. 차갑네 정말. 팔 말고 무거운 몸뚱이를 받치라고! 나머지 팔은 뭘 하나 봤더니 담배를 꼬나물고 있다. 하아.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되거든요. 아저씨. 아니 아가씨? 머리는 왜 저렇게 긴 건지. 얼굴 한번 곱상하다.


“아, 죄송. 그럼.”


이름 좀 물어보려 했더니 순식간에 몸을 돌리고 가던 길을 가버렸다. 등에 왠지 작아 보이는 기타케이스가 달라붙어 있다. 아티스트인가.


아침 뉴스에서 오후부터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질 거라면서 조심하라고 했다. 일부러 골라서 가지고 나온 댓살 많은 우산이 저 멀리 내팽개쳐져 있다. 꼴사납네. 이런 거나 주워주고 가던가. 이놈의 우산은 지팡이로도 못 쓰고. 괜히 가지고 나왔다. 날이 이렇게 맑은데 비는 무슨 비.


역 플랫폼에 놓여 있는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회사로 들어갔다. 하필 이런 날은 일도 많았다. 오늘은 잔업 확정이구나. 막차만 아니면 좋겠는데.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타이핑을 해대며 일에 집중했다. 몸 관리도 제대로 못 해서 비실대는 것 같은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가서 점심을 먹고 사 온 제일 큰 크기의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뜨거워. 속 데이겠네. 어디서 우르릉하는 땅 울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려오는 것 같다. 내 뱃속인가? 입맛이 없어서 밥을 남겼더니 배가 시위를 하나 보다.


“사원 여러분께 알립니다. 지금 밖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일까지 최대 강수량은 870밀리라고 합니다. 안전을 생각하여 지금 곧 귀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 하늘이 돕는 건가. 이럴 땐 얼른 집에 가 줘야지. 댓살 많은 우산이 도움이 좀 되려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나가보니 밖이 컴컴하다. 어디서 구르릉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아직 오후 3시밖에 안 되었으니 어떻게든 가겠다 싶었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고 서 있다가 냉큼 뛰었다. 열 발쯤 뛰었을까? 주변이 번쩍 하는 것 같더니 하늘이 갈라지기라도 했는지 천둥과 함께 비가 퍼붓는다. 이게 바로 양동이로 퍼붓는다는 거지. 우산으로 겨우 가린 몸도 바닥을 때리고 되돌아오는 빗물에 후둘겨 맞아 순식간에 다 젖어버렸다.


비를 받아내는 우산이 무거워서 잡고 있기가 힘들다. 안 그래도 무거운 우산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우산을 살짝 쳐들었을 때였다. 미친 바람이 우산을 뒤집고 잡아채 가 버렸다. 몸이 뒤로 밀리는 통에 잡고 버틸 수가 없었다. 제길. 비싸게 주고 산 우산 날려 먹었다.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달렸다. 겨우 역에 도착해서 젖은 옷을 짜냈다. 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저기요. 이거.”


고개를 드는 내 눈에 아까의 아티스트가 한가득 들어왔다.


“어?”

“이 우산 쓰라고요. 그럼.”


손에 쥐어 주는 걸 얼떨결에 받았다. 아티스트는 빗길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뭐지. 저 사람 나 좋아하나? 어쨌든 좋았다. 우산을 꼭 쥐고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이제 조금만 가면 집이다. 비는 점점 더 거세져 갔다. 하지만 우산이 있으니까.


집에서 20분쯤 떨어져 있는 역에 내렸다. 우산도 없이 머리만 가리고 달려 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만면의 미소와 함께 우산을 폈다. 우아하게 빗속을 걸어 나갔다. 비가. 우산을 쓰지 않은 것처럼 머리로 비가 들이친다. 이상한 생각에 올려다본 우산 꼭대기에서 내 머리통보다 큰 구멍이 나를 비웃는다.


젠장. 이놈의 아티스트가. 나한테 우산을 버리고 간 거였어? 이 새끼. 한 번만 더 나타나기만 해봐. 내가 아주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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