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 물어보는 인간 면접관 VS 피도 눈물도 없는 AI면접관
대학을 졸업하니 23살, 아직 사회로 나가기에는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졸업을 유예했다. 그리고 24살. 이제는 정말 취업을 해야 했다. 근데 나 뭐하지? 뭐를 해야 할까? 점수에 맞춰 들어가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회계학과에 들어갔었다. 첫 시험에서 난생처음으로 F를 받고, 아 이건 진짜 아니다 싶어 자퇴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사이 또 학우들과 친해져 버린 나는 자퇴보다는 전과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뜬금없는 무역학과라는 졸업장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옆 동네에 큰 페인트 회사가 있는데, 그곳에서 사무직을 뽑는다 했다. 우리 집에서 버스 한방이면 30분, 게다가 나의 모교와 가까이 있는 그곳. 내가 안 될 이유는 없어 보였고, 초보 취준생의 근본 없는 패기는 하늘을 뚫을 것 같았다. 자기소개 그리고 장단점, 각오와 같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읊조리다 보니 어느새 회사 입구에 도착했다.
오래된 회사라 그런지 그런지, 건물 자체가 매우 늙어 보였다. 이 건물이 이 건물 같고, A동을 가야 하는데 B동밖에 안 보이는데 정말 미치고 팔짝 뛰고 싶었다.
물로 목을 축이고 곧장 면접장에 들어갔다. 면접장이래 봤자 바로 옆 문 하나만 열면 됐다. 문이 열리고, 면접관의 눈과 마주쳤다.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 나는 우리 아빠보다는 어린 어느 남성분이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저 눈빛에 덜컥 겁이 났다.
면접자들 3명이 동시에 의자에 앉자마자 시작된 면접. 기껏 준비해 온 1분 자기소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면접관의 줄줄이 소시지 같은 질문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다.
초보 취준생의 콧대를 꺾어 기를 죽이려는 듯한 다소 당황스러운 내용의 것들이었다. (면)접관은 첫 질문으로 아버지의 직업을 물었다. 공무원 이세요.라는 내 대답이 석연찮았는지 어디서 근무를 하시는지 캐묻기 시작했다. 얼굴도 모르는 우리 아빠를 궁금해하던 면접관은 뒤이어 내 혈액형을 물었다.
A형인데요.
A형이면 소심해서 일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면접관.
사실 내 혈액형이 A형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몇 년 되지 않았다. 항상 B형이라고 하고 다녔는데(엄마가 B형이라 함)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확인해보니 A형이었고, 그 길로 놀란 맘으로 병원에 가도 결과는 A형이었다. 18년 동안 B형이라고 믿고 산 덕일까, 나는 내가 소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근데 처음 보는 면접관은 A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소심할 것 같다고 했다. 가운데 앉아있던 면접자는 본인은 O형이라며 소심하지 않음을 어필했다.
속으로 뭐 이딴 혈액형 채용이 다 있어 싶었다.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소극적인 성향보다는 적극적인 사람을 원한다 해도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됐다. 심플하게 본인의 성격은 어떤 것 같나요? 본인의 성향은 어느 쪽에 가깝냐고 물어보면 됐을 일 아닌가. 그것은 마치 오래된 건물만큼 시대를 역행하는 질문이었다.
그렇게 아빠의 신상, 내 혈액형, 학교만 줄줄 털리고 면접은 끝이 났다. 어젯밤 잠들기 전 천장을 보며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외우고 또 외웠던 자기소개는 오후 2시 30분 쯔음 하늘나라로 증발해버렸다. 참 허무했다.
이제 나가도 좋다는 말에 뭐 이딴 면접이 다 있냐 하는 맘으로 나오는 길에 직원분에게 봉투하나를 받았다. 면접비였다. 첫 봉투였다. 좋긴 좋았지만 뭐 이런 돈이 다 있어하는 맘으로 동네 슈퍼에 가서 3만 원어치의 전투식량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면접 간다던 애가 씩씩거리며 양손 무겁게 봉지를 들고 오는 모습을 본 엄마는 더 이상 면접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자퇴라는 적극적인 방법보다, 다소 소극적인 방법으로 전과를 택한 대학생이었던 A형, 소심한 면접자였던 그날의 나는 뭐 이런 면접이 다 있어? 하며 훌훌 털어내 버렸다.
혈액형 취조 면접을 당했던 날로부터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세상은, 대한민국은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 변화의 바람은 면접 시장에도 들이닥쳤다.
이제는 AI가 면접관이라고 한다.
더 이상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정장을 입고 면접장에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좋다. 하지만 가장 편한 장소, 원하는 시간에 면접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이 AI면접은 정말 무서운 놈이다.
시선이 흔들리면 커닝을 의심하고, 솔직하게 답하지 않으면 대리시험 의심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준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표현을 쓰는지에 따라 직무적합성 결과까지 나온다는데. 거참 똑똑한 놈이 아닐 수 없지만 동시에 무섭다.
같이 일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는 직접 대면하고, 대면이 어렵다면 온라인 면접으로 봐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객관적인 결과를 위해 도입되었다는데, 면접자들에게는 이 또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인간들도 피곤한데, 이제는 기계랑 면접을 보라고? 후
만약 내가 진짜 진심으로 온 맘을 다해, 아니 온 우주의 힘을 빌어 절박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는데 기계가 내 맘을 못 알아준다면? 그렇게 면접은 끝이 나버리는 걸까? 어쩌면 면접관에게 허튼소리를 듣고 떨어지는 것보다 더 슬플 것만 같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름 좋은 것 같다. 근데 이 AI를 면접자의 대답이 아닌, 면접관들의 질문을 필터링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어떨까?
혈액형이 소심한 A형이세요?
아버지는 어디에 다니세요?
등과 같은 질문을 하면, AI가 이렇게 말해주는 거다.
"신뢰할 수 없는 질문임."
"쓸데없는 질문임"
"면접관의 자질이 의심됨"
"직무와 상관없는 반복적인 질문을 할시 퇴출됩니다." 같이 말이다.
아무쪼록 인간이든, AI든 진짜 면접다운 면접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길 바라며....
<참고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