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반복적으로 쌓이다 보면 세상에 없던 나만의 문법이 된다.
습관이 반복적으로 쌓이다 보면 세상에 없던 나만의 문법이 된다.
그 문법은 내 몸에 체득되어 나를 나답게 만드는 원칙이 된다.
나 역시 반드시 하루에 꼭 하는 3가지 습관이 있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떠오른다. 길을 걷는 도중에도, 잠자던 중에도, 운동할 때도 항상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른다. 평소에 고민하던 생각에 대한 답들은 어느 날 불쑥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기 마련이고 이걸 놓치지 않기 위해 노트와 펜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덕분에 스마트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어플은 '메모'다. 잠자리 근처에는 꼭 노트 한 권과 펜을 머리 위에 놓는다.
애플, 삼성, LG, 구글에서 스마트폰 신제품이 나오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왔는지, 스펙은 어떠한지 찾아본다. 광고 이미지도 찾아보고, 집 근처 핸드폰 매장 앞에 걸린 홍보사진들도 본다. 대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버스를 타고 백화점 1층 매장을 혹은 학교 앞 화장품 가게에 들어가 수많은 광고사진들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도 혼자 걷는다. 관찰하기 위해서다.
길을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왜 사람들은 걸어가면서도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할까?
게임이나 영상을 하면서 걷다 보면 다치지 않을까?
게임, 영상에 쌓인 데이터들은 어디로 저장될까?
저 사람이 보는 영상은 AWS를 이용할까? AZURE일까? ' 등
삶 속에서 기술들이 어떻게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
며칠 전 우연히 집 근처에서 포르셰 타이칸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 분명 포르셰이지만 엔진 소리가 없었다. '전기차인가?' 나는 곧장 번호판을 보았다. 파란색이다.(전기차는 파란색 번호판을 사용한다.)
조용하면서도 강렬하게 달리는 타이칸을 보며 '전기차 기술'이 점점 발전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재무제표와 실적보고서를 보다가, 종종 몇몇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단어들을 찾아본다. 며칠 전 본 LG화학 보고서에는 '원재료 가격 하락'이라는 단어가 평소보다 눈에 들어왔다. LG화학은 배터리 회사 이전에 석유를 다루는 회사다. 자연스럽게 석유 가격 차트를 본다. 그다음은? 리튬이온 배터리 제조에 필요한 코발트 가격을 본다. 리튬이온 배터리? 집에서 사용하는 무선청소기에는 어느 회사 배터리를 사용하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매번 이런 방식으로 연관관계를 찾는다.
드라마 볼 때도 처음에는 스토리를, 두 번째는 배우 연기만 본다.
세 번째는 소리를 끄고 영상만 본다. 영상을 보며 색채와 느낌을 분석해본다.
'연출자는 왜 이 장면에서 마스터 샷이 아닌, 클로즈업 샷을 사용했는가?',
'이 드라마 이야기와 색감은 어떤 관계일까?'
'이 영상을 위해 어떤 렌즈나 카메라를 사용했을까?라는 질문을 하며
드라마에 사용한 카메라를 찾아보기도 한다.
잠시 누워 생각들을 엮어본다. 이렇게 관찰하고 적은 생각들. 마치 작은 점들이다. 이 작은 점들을 하나씩 나열하고 정리한다. 파편같이 흩어진 점들을 정리하다 보면, 점차 같은 주제를 가진 선으로 이어진다. 그 선을 다시 연결하다 보면 우리 삶의 모든 면들이 서로 연결되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씩 묶고 엮은 점과 선을 계속 다듬고 나면 어느 순간 하나의 큰 면이 되고 글이 된다. 이렇게 일상에서 쏟아내는 호기심에 귀 기울이며 매일 조금씩 적는다. 내가 지금까지 브런치에 적은 모든 글은 전부 이렇게 시작했다.
'호기심' 혹은 '관찰'이라는 매우 작은 점. 이 작은 점들이 모여 큰 점이 된다. 이걸 다시 모으면 선으로 변한다. 그 선을 묶고 엮다 보면 어느 순간 면으로 변한다. 내가 적은 무수한 단어 하나하나가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이 반영된 면으로 변해있다. 그 생각들은 '지금의 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이다. 어쩌면 오늘도 나는 나를 온전히 보기 위해 쓰고 있는지 모른다.
운동은 잃어버린 나. 자존감이 낮았던 나를 찾게 해 준 해방구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몸무게는 128kg 정도였다. 어느 날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갔다. “학생. 너무 살이 쪄서 무릎 연골을 다쳤네요. 다행히 많이 다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살을 빼지 않으면 아마도 연골이 나갈 거예요.” 나는 그렇게 운동을 시작했다. 다소 시간을 걸리기는 했지만 68킬로를 감량했다.
종종 헬스장에서 고등학교 시절 나만큼 뚱뚱한 이들을 본다.
"지금은 몸 때문에 가동범위가 약해요. 하지만 천천히 해봅시다'.라는 트레이너들의 말.
어떤 이는 ' 6개월 전에는 너무 뚱뚱해 런지를 할 수 없었는데.. 이게 이제 되네요?
전 이거 못할 줄 알았어요.'라며 감격하면서 말한다. 이런 그를 보며 트레이너는 그를 더욱 격려한다.
"야 너 요즘 운동하더니 허리가 좀 들어갔어. 야 멋진데?' 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운동을 제일 잘한 친구 놈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그 말에 용기를 얻었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 친구의 말을 기억했다. 어쩌면 그 친구는 그냥 아무런 뜻 없이 말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 한마디는 자존감을 잃지 않게 돕는 나침반 같은 말이 되었다. 트레이너와 함께 웃으며 런지를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짧은 순간 예전에 나를 생각했다. 나는 헬스장에서 그런 이들을 보면 언제나 응원한다.
사실 68kg을 감량했다고 몸짱이 된 건 아니었다. 몸은 오히려 쇠약해졌다. 다이어트 후유증에 기립성 빈혈이 생겼고, 길에서 두 번 정도 쓰러지기도 했다. 몸이 쇠약해져서 한 달간 학교에 나가지 못하기도 했다. 의사는 나에게 10kg 증량을 권했다. 정확하게 근육을 만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28kg 시절 유산소 운동과 식단관리만 했다. 웨이트는 전혀 하지 않았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어떤 운동을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운동을 하며 땀에 젖은 나를 보며 편견 없이 날것의 나를 본다. 덤벨, 파워 렉은 정직하다. 내가 스스로에게 소홀했다면 코어 근육은 나에게 강력한 지탱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다칠 수도 있다. 운동을 하면서, 나는 매 순간마다 가장 날 것의 나를 본다.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 나를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운동할 때는 오로지 몸과 정신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친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어제의 나'를 비교대상으로 삼는 순간 비교는 나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된다. 그저 덤벨을 드는 순간 날 것의 나를 솔직하게 대면할 뿐이다. 지금 내 눈앞에 어깨가 넓고, 이두와 삼두가 멋진 사람들은 나에게 소용없다. 어차피 나에게는 없는 근육이다. 그걸 비교한다고 나에게 근육이 생기는 게 아니다. 며칠 전 헬스장에서 풀업을 하는데 ‘닥치고 스쾃’이라는 노래가 나오더라. 그 노랫말 가사처럼 ‘닥치고 스쾃'하면 된다. 비교도 슬픔도 필요 없다.
운동은 시간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결코 운동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운동을 배신할 수는 있지만... 어제의 나를 내가 조금이라도 이겨냈다면? 운동 자세와 무게가 이를 증명한다. 3대 500을 찍는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제 들었던 10kg 덤벨은 참 무거웠어. 그런데 오늘은 10kg 덤벨이 조금은 수월해진 거 같아" 같은 소소 함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매일 스스로를 독려한다. 덤벨과 땀을 흘리며 물을 마시면서 스스로를 토닥인다.
너무나 휘발성이 강한 시대다. 자신을 스스로 토닥여 주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누군가의 위로보다는 스스로를 토닥여주는 마음속 여유가 더 필요하다. 누군가 나 대신 쉬어주지 못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존중해야 한다. 나는 이걸 운동을 통해 배운다. 아직 덜 성장한 근육을 보며 도전한다. 실수로 근육을 다치면 스스로에게 미안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운동을 마치며 팔을 만져주면서 말한다.
'오늘도 수고했어.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잘했어' 이렇게 스스로를 격려한다.
성격이 급하고 차분하지 못해 요리를 한다. 요리를 하다 보면 어제보다 더 차분해진다. 이건 요리 그 자체 때문이다. 요리는 항상 순서대로 해야 한다. 팁은 있어도 요행은 없다. 백종원 님이 유튜브나 티브이에서 쉽게 요리하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그 과정을 잘 보면 수많은 과정을 농축해서 알려준다. 백종원 님도 결코 요리 순서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백종원 님은 참 대단하다.
모든 요리 순서는 의미가 있다. 그 과정마다 조리법과 재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흥미롭게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요리 순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어떤 자유? 재료라는 자유. 재료를 바꾸면 수없이 다양한 요리들이 나온다. 돼지고기를 소고기로, 마늘을 파로, 정경채를 깻잎으로 말이다. 마트에서 가서 감자칩만 보아도 같은 감자칩에도 수많은 맛이 있지 않은가? '재료'라는 자유와 '순서'라는 원칙이 깔린 요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요리를 주제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 혹은 요리를 하는 이들의 고충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어머니가 주방을 사용하는 방식을 두고 서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어머니를 부모 이전에 한 사람으로 더 이해하게 된다.
사실 10분이면 먹을 요리를 3,40분이라 투자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효율적이다. 마리텔에서 '짜장면을 집에서 이렇게 해야 할까요? 그냥 시켜 드세요.'라는 백종원 님의 말은 참 지혜롭다. 하지만 볶음밥을 만들 때 '마늘 기름을 사용할까? 오늘은 파 기름?' 같은 아주 작은 고민은 맛에 큰 변화를 준다. 볶음밥을 만들어도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다. 자연스레 어제보다 더 유연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어쩌면 요리는 그 자체를 비효율적일 수도 있으나, 손쉽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효율적이다.
2주일 전 어머니가 덜 익은 아보카도를 사 오셨다. 1주일이 지나도 익지 않은 아보카도를 보며, 어머니는 벌컥 화를 내셨다. 익지 않는 아보카도를 괜히 툭툭 치면서 '넌 언제쯤 익을 거야!'라며 화내신다. 어머니는 덜 익은 아보카도가 무척이나 얄미우셨나 보다. 그 순간 나는 종종 해 먹는 당근 퓌레가 생각났다.
당근 퓌레를 만드는 일은 간단하다. 당근, 물, 소금, 레몬, 버터(올리브 오일로 대체 가능)를 넣고 당근이 보슬보슬해질 때까지 끓인다. 푹 익은 당근을 믹서기로 갈면 당근 퓌레가 완성된다.‘당근 퓌레를 만드는 과정을 아보카도에 응용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보카도를 반으로 잘라, 씨를 뺐다. 하지만 아보카도는 삶기보다는 찌는 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찜통에 아보카도를 넣고 쪄보니, 아보카도는 내 생각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아보카도 과육을 발라내 믹서기에 넣었다. 믹서기에 아보카도 오일을 조금씩 부어 갈았다. 소금과 후추를 넣어 간을 맞추니 맛이 무척 좋았다. 물론 이렇게 만든 아보카도 퓌레는 1,2분 안에 내 입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그 1,2분을 위해 1주일을 생각한 나 자신을 생각하면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요리는 언제나 소소함과 작은 것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게 돕는다. 작지만 강한 울림. 그 울림은 나를 나답게 만들기에 오늘도 볶는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일상 속 소소함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종종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은 무언가 나를 ‘수식하는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 나를 나답게 하는 건 일상 속 작은 소소 함이다.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거나 토닥일 때 오히려 나 자신을 발견한다.
2년 전, 도쿄 츠타야 북 아파트먼트를 보고 나서 도쿄 모노레일 막차를 타고 하네다 공항에 겨우 도착했다. 그날은 점심도 저녁도 굶었다. 너무 배가 고파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구입해 먹었다. 캐리어 위에 도시락을 놓았다. 도시락을 보며 ‘왜 이리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해외까지 와서 꼭 이래야 해?’ 라며 자신에게 질문했다.
스스로에게 참 미안했다.
글 소재와 궁금한 걸 찾기 위해 몰두하는 '나'는 좋다. 하지만 그런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나를 무시하는 '나'를 생각하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무엇을 위해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살아갈까?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를 토닥여주지 못하는 나. 스스로를 애틋하게 대하지 못하는 나’이런 나 자신에게 나 스스로가 너무 미안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하면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높은 점수를 받으면 '잘했다'라고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세상은 '점수'로 평가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뭔가 성취한 거 같은데
난 왜 여전히 허전하고 마음이 비었을까?'라는 고민에 빠진다.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목표를 잡고 그걸 위해 계속 무언가를 먹어치운다.
과연 나를 나답게 수식하는 건 '어떠한 단어'일까?
감정 없는 아이처럼 그저 '목표'만 계속 스스로 만들고 그걸 계속 먹어 치우면 되는 걸까?
스스로를 보지 못하는 온기 없는 나 자신이 되는 건 아닐까?
과연 나는 무엇일까? 무언가로 나를 채우고 남은 나는 '온기가 없는 성취물'일까?
온기가 남아있는 애틋한 나일까? '
우리는 매 순간 아픈 기억, 후회했던 일들, 남에게 상처 주었다는 자책감,
상처 받았던 기억, 선택에 망설였던 순간들, 그런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
그 과정에 지친 '나'를 스스로 보듬어주는 사람만이 더 뜨거워지고 유연해질 수 있다.
나를 스스로 보듬지 못하는 이는 그 누구도 보듬어 줄 수없다.
참고 견뎌내며 스스로를 애틋하게 만져주며
자신을 지켜나간 이들만이 '더 나 다운 나'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겨내야 한다.
자신만의 원칙을 세우며, 스스로 주변에 매몰되는 걸 이겨내도록 토닥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무언가'로 자신을 채우고,
성장이 멈춰버린 아이로만 머물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변함없이 쓰고, 들고, 볶는다.
목표와 성취에 함몰되지 않는. 애틋하고 온기가 남아있는 나를 보듬어 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