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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 May 05. 2021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새로워진다

(2)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다

내가, 이걸, 하고야 만다.


꾸역꾸역 80강을 완강을 했다. 그리고 책의 문장들을 뽑아 달달 외웠다. 하루에 내가 공부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매일 계산하기 시작했다. 직장인이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시간은 어떻게든 짜내면 만들어졌다. 출퇴근길 2시간 반. 점심시간 한 시간. 집에 와서 집중할 수 있는 한두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시험을 앞둔 일주일은 회사를 다니며 공부에만 매달렸다. 벚꽃이 골목골목 피어나며 봄이 왔음을 알렸지만 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심지어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중국어 공부를 하기에도 마음과 몸이 충분히 바빴다.


시험 전날, <펜트하우스> 본방을 포기하고 중국어 성어를 외우기로 했다. 성어를 쓰면 고급 중국어 구사자로 보여 가산점을 준다고 하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금은 언젠간 빛이 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공부는 신념이 있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성어를 외우는 동안 거실 티비에선 오윤희가 소리를 지르고 심수련이 눈물을 흘렸다. 공부가 신념이 있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내 생각보다 의지력이 강한 인간인 것 같았다.






시험 당일이 되었다. 시험만 끝나면 나가서 실컷 벚꽃을 봐야지, 했는데 하필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주중 내내 점심시간마다 사무실 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면서 공부했는데! 시험만 끝나면 꽃놀이를 가리라 벼르고 별렀는데! 나는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마지막 남은 초콜릿을 꺼내어 시험장으로 향했다.


손소독과 열체크를 하고 시험장에 들어섰다. 얼마만에 받아보는 컴싸(컴퓨터용 사인펜)과 OMR 카드인가. 수험번호를 확인해 OMR 카드를 채우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손을 들어 감독관을 불렀다.


“제가요, 너무 긴장이 되어서 그러는데… 어떻게 하는 거예요?”


감독관은 친절하게 마킹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주머니는 계속 “제가 긴장이 되어서요.”를 부산하게 반복했는데 실제로 마킹이며 오리엔테이션 모두가 서툴러 보였다. 심지어 가족이 시험장에 잘 도착했는지 전화까지 했다.


"어, 나 시험장 잘 왔어. 응. 아오 너무 긴장돼. 응~ 너무 떨려. 응 ~ 시험 끝나고 전화할게~ "


아아…  나는 그때 그 짧은 통화로 나의 불행을 직감했었어야 했다. 내 바로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아나운서를 해도 될 만큼 또렷하게 잘 들리는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TSC는 각자 모니터 앞에 앉아 30분동안 총 7개의 회화 문제에 답하는 시험이다. 매 문항에 답변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남은 시간이 초 단위로 모니터 화면에 표시된다. 시간 제한을 넘어가면 녹음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안에 조리있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옆자리 사람의 대화가 다 들리는 회화 시험의 특성상, 옆에 최대한 목소리가 작고, 가능하면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중국어를 못하는 사람이 앉는 게 유리했다. 하지만 나는 곧 닥쳐올 불행을 모르고 명랑하게 머릿속으로 성어를 복습하고 있었다.






긴장 속에 침을 꿀꺽 삼키며 시험이 시작되었다. 초반에 옆자리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큰 수준이었으나, 후반부가 되어 문제의 난이도가 올라가자 점점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가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그렇지 않아도 큰 목소리를 점점 키웠다. 생각만큼 문장이 유창하게 나오지 않자, 문제와 그녀의 싸움은 시험 후반이 될수록 격렬해졌다. 말을 하다가 제한시간에 걸리면 “아!” “뭐야!” “아이씨!” 하고 격렬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녀의 뒤를 이어 몇몇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시험장 전체의 데시벨이 점점 올라갔다. 술집에서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면 전체의 볼륨이 올라가듯이. 점점 시험장은 명절의 시장바닥처럼 변해갔고 사람들은 반드시 가격 흥정에 성공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휘말려 내가 하고자 한 말을 잊고 중언부언했다. 막판에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악을 쓰다시피 했고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논리적인 답변을 하기를 포기한 채 어떻게든 시간만 채우자는 생각으로 라오스가 준 템플릿만 맴맴 되풀이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은 모두 다릅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아아, 내 답변은 채점관에게 얼마나 바보같이 들릴 것인가.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감춘 채 마지막 남은 10초까지도 알뜰하게 템플릿 문장으로 채웠다.


“종합하자면 뭐든 적당한 수준에서 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직 3초가 남았다.


“씨에씨에. (감사합니다)”






시험을 끝내고 시험장 밖으로 나오니 벚꽃은 비와 함께 다 떨어져 져 있었다. 즐겨보지도 못한 한 시기가 완전히 끝나 버렸음을 알았다. 지난 한달 반 동안 나의 노력은 뭐였을까. 정작 시험에서는 그토록 열심히 외운 성어도 어려운 구문도 말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문장과 내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문장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었다. 도무지 이 시험을 다시 볼 힘이 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났다.


그것은 곧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새로워진다!" 를 외치는 라오스와 헤어지는 것이었고, 그간 청소를 미뤄왔던 더러운 방과 먹다 남은 배달음식 그릇들로 가득한 냉장고를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으며, 퇴근 후 밤공부를 핑계로 죄책감없이 집어먹었던 초콜릿와의 결별이기도 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어제 못 본 펜트하우스를 보려고 노트북을 켠 참이었다. 갑자기 귓가에 어젯밤에 외웠던 중국어 성어들이 들렸다.


금은 언젠간 빛이 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공부는 신념이 있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정작 시험장에서는 생각나지도 않던 중국어 성어들이 갑자기 떠올라, 힘들고 지친 날 반려묘가 집사를 위로하듯이 곁에 머물렀다. 엄청난 노력을 한 뒤 그것이 쑥 한꺼번에 빠져나갔을 때의 기분을, 그 낭랑한 단어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허탈감, 그렇지만 최선을 다했단 감각,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나 싶은 마음 사이로, 누가 틀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라오스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자동 재생되었고 나는 피식 웃었다.


"자, 여러분, 따라해 보세요.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새로워진다!"


벚꽃비와 함께 중국어와 함께했던 나의 진한 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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