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마라(麻辣)를 만나러 청두로

1. 시월, 중국, 청두

by 몽돌

개천절 연휴에 연차를 붙여 중국 쓰촨 성 청두에 다녀왔다.


청두(成都)는 양꼬치엔 칭다오!로 유명해진 도시 칭다오(青岛)와는 다른 도시이다. 칭다오는 인천과 마주 보고 있는 해안도시이며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가지만, 청두는 중국 내륙지방인 쓰촨 성에 위치한 도시로 비행기로 네 시간 정도 걸린다. 매운 요리의 본고장 쓰촨, 구 촉한의 근거지인 청두! 마라를 사랑하는 나와 삼국지를 사랑하는 P에게 그 정도 이유면 항공권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몇 해 전 어느 추웠던 겨울, 친구의 손에 이끌려 서울 대림동 봉자마라탕에서 마라님을 처음 영접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마라탕이 대중화되기 전이었는데, 그 이국적인 음식을 중국어 간판이 주렁주렁 달린 대림 차이나타운에서 처음으로 접했으니 굉장히 이국적인 경험이었다. 손님 대부분이 중국교포인 것 같은 가게에서, 중국인 아주머니에게 안 되는 중국어로 주문을 했다.


"이..이거 마라탕, 이거 띠산시엔, 이 완 미판, 하이요우 이 핑 피지어우......(마라탕 하나, 지삼선 하나, 밥 하나, 그리고 맥주 한 병이요......)"


너무 매울까 걱정했던 마라탕은 생각보다 맵지 않았다. 마라(麻辣)에서 마(麻)는 아린 맛, 라(辣)는 매운 맛이라던데, 과연 복합적인 레이어의 맛이었다. 훅 치고 들어오는 여러 향신료들의 향과 얼얼한 통각은 한국 땡초고추와는 또 다른 결의 매움을 선사했다. 매운 음식은 도중에 멈추면 더 맵다. 맵고 짠 기름에 푹 적셔진 건두부, 배추, 청경채 등을 부지런히 건져먹고 나니 입안에 남는 얼얼함에 한 달 묵은 스트레스까지 풀리는 듯했다. 두피까지 마라 향이 짙게 배인 것이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다음 날 아침 그 빨간 국물이 다시 생각날 정도로 마라는 매력적인 음식이었다.


그 뒤로 나는 본격 마라의 노예가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이는 매일의 빡침을 그러모아 마라탕을 맛있게 먹는 데 썼다. 힘든 일이 많을수록 마라는 맛있어졌다. 힘들어서 자주 마라를 찾는 대림동 계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언젠간 중국 사천 지방에 가서 진짜 마라를 먹자.

거기 남자들은 더운 여름에 웃통을 까고 마라를 먹는대. 완전 대박이지.


그리고 나는 그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쓰촨성을 방문하게 된다.






항공권을 지를 무렵 나는 지치고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기대를 안고 돌아온 회사는 전과 다를 바가 없었고 복직 후 일 년 반이 되자 다시 몸과 마음이 마모되어 갔다. 일은 의욕대로 되지 않았고 사람은 늘 힘들기만 했다. 지하철에서 누가 나를 툭 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불같이 화가 났다. 매일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귀가해 멍하니 넷플릭스를 켜두고 과자를 먹었고 아침엔 돌덩이같이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출근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더이상 가슴을 설레게 하지 않았다. 되려 화가 났다. 아 생각대로 사는 게 잘 안되는데 어떡하라고! 누가 다 생각하는 대로 사냐고. 그런 사람 얼마나 되겠냐고.


이렇게 못난 모습으로 한 살을 더 먹는 게 두려워질 즈음, 생각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돈쓰는 일 뿐이구나.


그렇다면 진짜 마라를 먹으러 가자.


원조 마라를 영접하러 중국 쓰촨성 청두행 항공권을 알아보았다. 삼국지 게임에 푹 빠진 P에게 청두가 옛 촉한의 근거지임을 알려주며 함께 가자고 꼬드겼다. 마침 P가 존경하는 백종원 따거께서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로 이미 청두를 방문하시어 어디에 가서 뭘 먹으면 될지를 다 알려주셨으니, 여행 코스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10월 3일 개천절 연휴를 끼고 해외로 가는 비행기표는 대부분 시간이 갈수록 비행기 가격이 올라갔는데, 어째 중국 청두행 항공권은 가격이 소폭 하락하였다. 이것은 가라는 계시이다, 라고 생각하여 우리는 마침내 항공권을 질렀다. 마라의 매운맛만큼이나 불타는 추진력으로, 여행사를 끼고 중국 비자발급까지 끝냈다.


항공권, 숙박, 비자 다 클리어. 여행 준비 끝났네? 일정은 백종원 따거 루트로 다니지 뭐- 하고 우리는 질러놓은 여행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걱정이라면 도통 쓰지 않아 퇴화한 중국어 실력과, 인터넷 면세점에 내가 찜한 화장품이 언제 재입고되려나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연휴는 우리만의 연휴가 아니었다는 것을......


10월 3일을 낀 그 주는 중국 국경절 주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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