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에 대하여

영어 교육을 중심으로

by 에밀리

지난 밤, 저는 영어 문법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글을 작성했습니다.


(1) 국내파 기준으로 문법은 필수다.
(2) 구문 분석 없이 풀 수 없는 시험 구조가 존재한다.
(3) 줄세우기 교육 시스템에서 문법은 결코 빠질 수 없다.


그러자 한 인터넷 게시판 유저가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덧붙였습니다.


“난 사실 해외에 나가본 적도 없고, 어릴 때 영어유치원을 다니긴 했지만 문법 교육을 따로 받은 적은 없어. 외국인 강사들한테도 주로 정관사 같은 것만 지적받는 편인데, 그래도 수능·토플·토익은 다 나름 열심히 봤던 것 같아. 이번 수능 영어가 너무 어려워서 결국 2등급이 나오긴 했지만…”


언뜻 보면 그저 개인적인 경험의 공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코멘트 속에 암묵적으로 전제된 몇 가지 특권적 맥락 때문에 다소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사회구조적 데이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국내파”라는 말의 착시 — 모두가 같은 국내에서 자라지 않는다


해당 유저는 자신을 “국내파”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국내파라는 범주 안에서도 계급적 편차는 매우 큽니다. 2012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가구 소득이 1만 원 증가할 때 영어 성적 백분위는 0.029% 상승합니다. 이는 국어(0.022%), 수학(0.019%)보다 훨씬 높은 민감도입니다.


즉 영어 성적은 단순한 “노력형 과목”이 아니라, 가정 배경·지역·자본이 가장 선명하게 작용하는 과목입니다. 따라서 “해외에 나가지 않았다”라는 사실만으로 동일한 출발선에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2. “영유를 다녔다”는 진술: 이미 불평등이 시작된 지점


2012년 KDI 자료에 따르면 초등 입학 전 영어유치원(영유) 경험 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강남: 24.6%

비강남: 1.1%


영유는 단순히 “어릴 때 영어를 조금 접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언어 체계가 가장 민감하게 형성되는 시기에 격차를 벌리는 교육 상품입니다. 따라서 “영유를 다녔다”는 한 줄 안에는 이미 다음과 같은 조건이 내포됩니다.


부모의 경제력

조기 사교육 접근성

영어 노출의 양적·질적 차이

강남 중심의 교육 자본 구조 가능성


이 모든 것은 “문법을 따로 배우지 않았다”는 진술과 상충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그 진술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3. 노력의 서사 vs. 구조의 서사


해당 유저는 말했다고 합니다. “문법 교육은 따로 안 받았다. 수능·토플·토익은 열심히 봤다.” 그러나 노력의 서사는 종종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가리는 기능을 합니다. 토익 점수가 1점 오를 때 연봉이 1만 6천 원 상승한다는 KDI 연구는, 영어 실력이 “노력의 결과”라기보다


사교육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배경
그 속에서 축적된 문화자본
학습 능력에 대한 기업의 선발 편향


이 결합해 나타난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즉 준비 과정 전체가 이미 계층적 필터링 장치로 작동합니다.


4. "위대한 개츠비", 그것이 바로 ‘특권’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때마다, 기억하거라. 누구나 너만한 특권을 누리지 않았다는 걸 말이야.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on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이 문장은 단순한 도덕적 조언이 아니라 특권의 비가시성을 포착하는 사회학적 통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유를 다녔지만 문법은 안 배웠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영유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환경”에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시험장에서 이 둘은 같은 문제를 풀고, 점수는 실력으로 오해되며, 실력은 곧바로 개인의 노력으로 환원됩니다. 능력주의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결론: 그 코멘트에 회의적인 이유


해당 유저의 경험 자체가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경험을 한국 사회 ‘국내파’의 평균적 경험처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저는 해외 경험이 없었을지는 모르지만, 영유라는 조기 교육을 통해 이미 결정적 언어 자본을 획득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자본은 생각보다 훨씬 큰 특권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코멘트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국내파라는 범주는, 과연 한국 사회 다수의 국내파와 동일한 출발선에서 시작한 것일까요?”


이 질문 없이 능력주의는 구조적 불평등을 미화하고, 특권은 끝없이 비가시화됩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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