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유지에서 생긴 일
온 우주가 우리에게 공항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항공권을 알아볼 때마다 내심 중동국가를 경유했으면 했다. 가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지만 당분간은 중동 여행 계획이 없기 때문에 이사하는 날을 적극 활용해 보자는 심산이었다. 때마침 기회가 왔다. 일부러까지는 아니지만 긴 경유시간 티켓을 배제하지 않았고 결국 아부다비에서 14시간 경유하는 티켓을 만났다. 평소라면 되는대로, 발길 닿는 대로 여행을 했겠지만 다음 비행기를 놓치면 안되니까 이번만큼은 꼼꼼히 검색을 하고 계획을 세웠다. 사람은 안하던 짓을 하면 된다, 안된다? 안된다.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대통령궁'에 간다. 대통령궁을 구경하고 무료셔틀을 타고 '그랜드 모스크'를 간다. 다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온다. 얼마나 간단한 계획인가. 초행길이고 날씨도 더우니 욕심내지 말고 딱 두 군데만 보고 오자고 했다. 그런데 이 간단한 계획을 세울 때부터 뭔가 자꾸 어긋나기 시작했다.
문제 1: 택시비가 비싸다. 공항에서 한 곳만 왕복으로 다녀와도 6만원이 넘는다. 아예 마음먹고 하는 중동여행이면 모를까, 스쳐 지나가는 곳에서 돈을 많이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싶은데 목적지 간 거리가 멀고,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료셔틀 간격은 2-3시간이고, 그것도 하루에 3대가 전부다.
문제 2: 어쩜 딱 라마단 기간이네? 야경이 예쁘다는 모스크는 축소운영으로 6시에 문을 닫는다. 버스 시간과 모스크 운영 시간을 어떻게든 맞춰 보려 했으나 실패. 둘 중 비교적 현대적인 건축물인 대통령궁을 포기했다. 아부다비에 왔으니 상징적인 모스크만 봐도 되지, 뭐.
오후 1시. 비행기가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했다. 룰루랄라. 어차피 보너스처럼 얻은 시간인데 한 곳만 간들 어떠랴. 첫 중동 나들이가 설레었다.
문제 3: 모스크를 가려면 교통카드를 구입+충전해서 버스를 타야 한다. 수속을 밟고 나와서 교통카드를 사는 기계와 옆에 도와주는 직원을 만났는데 신용카드 투입구가 고장 나서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고 했다. 이 정도는 문제없지! 소중히 가지고 다니던 달러를 조금 환전했다. 10분 정도 걸렸을까. 금방 환전하고 다시 갔는데 기계가 고장 났다. 응?? 이미 우리 보다 먼저 현금을 넣은 커플의 돈을 먹은 상태였다. 담당직원이 유지보수팀에 계속 무전을 치고 전화를 했지만 라마단 기간이라서 일 처리가 느리다고 한다. 현금이나 신용카드로 버스 요금을 결제할 수 없고, 공항 전체에 교통카드 사는 곳은 여기 하나밖에 없으니 조금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렇게 꼬박 1시간 30분을 기다렸다.
이제 오후 3시.
문제 4: 모스크 가는 버스 간격이 1시간이다. 2시 40분에 한 대가 갔으니 다음 버스는 3시 40분이다. 공항에서 모스크까지는 1시간이 걸린다. 모스크는 6시에 문을 닫으니 늦어도 3시 40분 버스를 타야 한다는 얘기다. 2시부터 기다렸는데 해결사는 3시 25분에 등장했다.
문제 5: 해결사가 오니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계를 손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카드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카드를 사서 충전은 기계에서 따로 해야 한다. 미치겠네. 버스 탑승까지 남은 시간은 15분인데 느릿느릿 카드를 판매하고, 심지어 충전기계에도 줄이 생겼다.
그래서 결론은.. 아무 곳도 가지 못했다. 환전 수수료만 까먹고, 오지게 기다리고, 귀찮은 출입국 수속만 밟았다. 공항 주변은 허허벌판이라 갈 곳도 없었다. 이 날 우리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오일머니 국가는 돈 쓸 준비가 됐을 때 가는 곳이다. 프라이빗 투어차량을 예약하는 건 15만원이 넘고(팁&입장료 제외), 사막투어도 1인 10만원 이상 줘야 하는데 그마저도 공항에서 오후 1시 이후에 픽업하는 투어는 없었다. 아부다비에서 한달살기를 할 생각이었거나 제대로 관광을 하려고 했다면 돈을 썼겠지만 잠시 나갔다 오는 일정에 몇 십만원씩 지출하고 싶지 않았다. 여긴 밥값도 비싸다. 이렇게 돈 쓸 마음이 없으니 아부다비가 거절한 것 같다. 쳇 치사해.
결국 공항라운지에서 10시간을 보냈다. 라운지 밥 먹으려고 14시간 경유 티켓을 자발적으로 끊은 셈이다. 3시 40분에 칼 같이 떠나는 버스를 보내고 다시 입국수속하러 에스컬레이터를 탔을 때 둘이 마주 보고 헛웃음이 났다. 별 일이 다 있네. 아직도 우리 지갑에는 언제 쓸지 모르는 디르함 지폐가 있다.
그러고 보니 7년 전쯤 튀르키예(당시에는 터키) 레이오버가 생각난다.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길에 터키가 무척 가보고 싶어서 일부러 긴 경유티켓을 찾았다. 시내 가는 방법, 환전, 점심메뉴, 모스크 정보를 야무지게 정리했다. 블루모스크를 구경하고 고등어케밥을 먹을 생각에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그런데 스페인 여행 막바지쯤 터키에 폭탄테러가 일어나 연일 뉴스에 나왔다. 쿠데타 여파로 생각보다 분위기가 더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급히 알아보니 오히려 경찰이 많이 돌아다녀서 안전하게 느껴지고 뉴스랑은 다르게 현지 분위기는 똑같이 활기차다는 글이 많았다. 하지만 우린 겁이 많다. 매우 많다. 그래서 장장 17시간을 공항에서 보냈다. 또 자발적으로. 물론 연속으로 K팝스타를 보면서 심사위원 놀이를 하느라 세상 신나게 17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이쯤 되면 레이오버가 맞지 않는 건가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아직까지 내 계획대로 된 레이오버 여행은 한 번도 없었지만 언젠가는 뜻밖의 도시에서 끝내주는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제발요!